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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r 18. 2024

범부채 뿌리가 마당가에

범부채 뿌리가 마당가에  


   

 새순이 파릇파릇 올라오던 범부채 뿌리 한 덩이가 마당가에 던져졌다. 올해는 범부채 꽃을 못 보겠군. 꽃대를 쑥 올려 잔가지를 뻗어 피는 꽃은 볼수록 매혹적이었다. 주홍빛 꽃잎에 까만 점이 박힌 꽃무리는 호랑나비와 범나비를 불러들이고 딱새랑 곤줄박이도 불러들인다.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새순을 만지며 드러난 뿌리를 쓰다듬는다. ‘어디든 옮겨 두면 살 텐데. 아깝다. 돌담 앞에 심어두면 될 것 같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귀 어두운 그가 그 말을 금세 알아듣는다. ‘다시 심을 테니 걱정 마소.’ 뿌리가 마르기 전에 제자리를 찾아주면 좋겠다. 


 그는 돼죽겠다면서 일을 벌인다. ‘누가 하래? 시키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서 고생하는 사람이 누군데. 돼 죽겠다는 말이 나와?’ 입 총을 다다닥 쏘아버리고 싶지만 나는 싱긋 웃는다. 구경꾼이 있어야 굿하는 재미도 있지. 오랫동안 목수 작업장이었던 창고는 단감 작업장으로 개조됐었다. 강철 지붕과 벽이 보기 싫다고 창고 앞에 자잘한 대나무를 심었다. 발품 팔아가며 오죽이라고 얻어온 것이 노란 죽이다. 대나무 밭이 형성되고 대나무 밭 사이에 꽃무릇이 피었다. 


 가을에 꽃무릇이 피자 ‘저거 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났지?’ 신기해했다. 새빨간 꽃무릇은 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그가 없을 때 도독 작업을 했었다. 범부채도 마찬가지다. 입 싹 닦았다. 또 어떤 바람이 불면 꽃무릇도 범부채도 사라지겠지만 몇 년 동안 눈 호강을 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철 야생화가 피는 화단을 가꾸고 싶었지만 번번이 내 희망은 묵살당했다. 애써 심어놓아도 시나브로 깎아대는 예취기 한 방이면 끝나버렸다. 그렇게 사라진 야생화의 넋이 마당을 배외한다. 


 대나무를 심어도 그 앞에 공터가 남았다. 그는 동네에 헌 집을 헐고 나온 구들돌을 구해다 납작납작 박았다. 납작 돌 박은 반듯한 땅은 솥단지 걸고 곰국 하기 제격이었다. 두 어른 살았을 적엔 곰국 솥이 여러 번 걸렸다. 재는 땅에 거름이 되고 불날 염려도 없었다. 거기 자리 펴고 앉아 북을 두드리면 사물놀이 패가 되기도 하고, 박수무당이 되기도 했다. 몇 년 지나자 돌과 돌 틈새에 풀이 돋았다. 가을이면 꽃밭도 되고, 봄이면 냉이도 캐고 쑥도 뜯는 텃밭이었다. 여러 번 겨울이 지났다. 


 올해, 삽짝의 매화가 피었다. 그가 뜬금없이 말했다. ‘저기를 파서 감자를 심어야겠다.’ 그의 머릿속은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를 만들어내는 아이디어 공장이 있다. 연일 공장은 신나게 돌아간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 보고, 아이디어 공장은 수시로 빛난다. 투자만 가능하고 수익은 없는 맹탕 같은 공장이다. 공장이 잘 도는 것은 좋은데 결과물이 신통찮으니 지극히 현실적인 나는 딴죽을 걸 수밖에 없다. 걸어봤자 나만 피곤하다. 딴죽을 안 걸면 아무것도 남아날 것 같지 않으니 울며 겨자 먹기다.


 사흘도 지나기 전에 괭이와 삽과 곡괭이, 쇠지렛대, 쇠꼬챙이 등이 대나무 밭 앞에 놓였다. 그는 돌을 덜어내 담을 쌓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마당까지 삐어져 나온 대나무 뿌리를 뽑아내고 뻗어나간 잔디뿌리도 걷어낸다. ‘아이고, 일 못 해 먹겠다. 조금만 움직이면 돼 죽것다.’ 한숨을 쉰다. ‘누가 하래? 잦아서 고생하는 재미로 사는 당신 아니우. 일을 하려면 돈 되는 일을 하면 누가 말려.’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것도 귀찮아진 나는 외면한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지. 살날이 죽을 날보다 짧은데. 관심 뚝 끊자.’ 관심 끊겠다지만 과연 끊어질까.


 대신 다른 것으로 마음을 돌린다. 은근히 기대했던 『한국 작가상』은 물 건너간 것 같다. 쥐에게 손가락을 물리기도 하고, 뜻밖의 인물을 만나기도 하고, 불을 피웠던 꿈도 다 허사인 모양이다. 작가라고는 하나 문단활동을 접다시피 하고 평생 산골에 칩거하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작품만으로 평가를 받을 수도 없을 것 같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전국 작가회 지부에서 제출한 동인지에서 뽑아낸 작품 중 예심을 통과한 9편의 소설이었다. 아무래도 작가회 회원이 많은 지역에서 올라간 예심 작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작가회 전 회원이 참여한 본심 투표였다. 작품성으로 가름할 수 있을까. 작품성보다 작가 위주의 투표가 될 확률이 높은데. 


 내가 마당가에 내팽개친 범부채 새순 같다. 누가 바라봐주지도 않고 돌봐주지 않아도 혼자 힘으로 피어나 한여름 땡볕을 확 끌어당기던 범부채 꽃처럼 필 수 있길 바랐다. 내 작품이 뽑힐까? 뽑힐 거야. 오기랄까. 기대를 버리지 못했지만 3월이 되자 자신이 없어진다. 과연 작가회 전 회원이 작품성만 보고 작가를 뽑을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공정한 판단이 가능할까? 누가 됐던 축하할 일이다. 당선작은 내 작품보다 작품성이 뛰어나겠지. 내 작품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았다. 지금쯤 당락이 결정되었을 텐데. 총회 참석할지 말지 알려달라는 소식만 왔다. 예심 통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범부채처럼 기운차게 겨울을 나고 새순을 틔웠는데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뿌리가 뽑혀 널브러진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마당가에 던져진 범부채 뿌리가 더 애잔하고 슬프다. 삶은 기다림의 길이다. 사람은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 덕에 산다. 범부채 뿌리를 온전하게 자랄 수 있는 자리를 택해 옮겨 심어야겠다.

                 202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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