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중간>
그러나 하늘의 신은 장난꾸러기였다. 푸른 용과 붉은 용의 시소게임도 다정한 우정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슬쩍 섬에 자라는 나무 한 그루를 택해 여자 형상으로 깎았다. 나무조각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나무 조각은 아리따운 처녀가 되었다. 신은 처녀에게 동백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신은 자신의 창조물에 빠져들었다. 신은 처녀를 하늘로 불러올려 자기 곁에 두고 싶었지만 처녀는 텅 빈 하늘보다 나무와 풀이 무성한 섬에서 살고 싶어 했다. 신은 섬을 푸른 용에게 주었다. 이제 섬은 푸른 용이 다스리는 땅이 되었다. 푸른 용은 신의 소유물인 처녀의 보호를 맡았다. 신은 자신이 만든 처녀를 사랑했다. 신은 가끔 땅으로 내려왔다.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거나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 신이 오는 날은 섬이 안갯속에 잠겼다. 푸른 용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면 조용히 바위굴에 들어가 앉았다.
안개가 걷히면 처녀는 더 화사하게 피어났다. 처녀는 온종일 혼자 놀았다. 작은 섬을 뛰어다니다 심심하면 바다에 풍덩 빠져 자맥질을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처녀의 살결은 밍크고래의 등처럼 윤기가 흘렀고 희고 단단하고 살결은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처녀는 해삼과 전복을 땄다. 가끔 푸른 용이 부드럽게 파도너울을 태워주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녀는 혼자 노는 섬이 좋았다. 가끔 다녀가는 안개가 좋았다. 안개에 안기면 포근하고 따뜻했다. 안개에게 몸을 맡기고 누워 달디 단 꿈을 꾸었다.
그럴 즈음이었다. 바다 밑에 사는 붉은 용이 산책을 나왔다가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를 봤다. 헤엄쳐 다니는 예쁜 물고기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고기의 몸에서 빛이 났다. 깜빡이는 두 개의 눈, 긴 머리칼, 부드러운 팔과 다리를 가진 고기였다. 용은 물고기를 에워쌌다. 처녀는 온몸에 붉은 비늘을 달고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용을 보고 기겁을 했다. 이리저리 도망을 쳤지만 용의 긴 몸은 처녀를 둥글게 에워싸 버렸다. 붉은 용은 사나운 몸짓으로 처녀를 위협한 후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온 물고기냐? 이 바다는 내 소관인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대답하라.
저는 하늘나라의 신을 섬기는 여자랍니다.
여자? 그럼 너는 하늘에 살아야지 왜 내 터전에 와서 노느냐?
저는 동백이라 하옵고, 저 섬에 삽니다.
푸른 용의 땅에 산다고? 푸른 용이 널 안 잡아먹은 거야?
푸른 용은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하늘의 신만 봅니다.
그러냐? 그럼 푸른 용을 불러 물어보자.
붉은 용이 한 번 꿈틀거리자 거대한 불기둥이 솟고 그 불기둥을 타고 바다를 솟구쳐 올랐다. 붉은 용은 푸른 용을 불렀다. 나와 봐라. 얼굴 좀 보자. 그렇잖아도 처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가슴을 졸였던 푸른 용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용은 처녀의 몸을 풀었다. 푸른 용은 냉큼 붉은 용으로부터 처녀를 받아 안았다.
그녀를 건드리지 마라. 신이 내 땅에 준 선물이다.
신이 너에게만 선물로 준 것이 아니다. 내게 준 선물일 수도 있다.
아니다. 신은 나에게만 그녀를 보호해 달라고 했다.
아니다. 나도 그녀를 보호할 수 있다.
신에게 물어봐라.
물어볼 것도 없다. 나도 그녀를 원한다.
붉은 용이 처녀를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푸른 용이 처녀를 감쌌다. 처녀는 온몸에 푸른 비늘을 단 푸른 용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다. 사랑에 빠지는 시간을 파울로 코엘로는 11분이라고 했지만 처녀가 푸른 용에게 빠진 것은 찰나였다. 처녀는 파르스름한 광채가 나는 푸른 용의 몸을 만졌다. 자신의 손길로 차가움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푸른 용은 붉은 용처럼 뜨겁지 않았고 부드러웠다. 푸른 용이 꿈틀거렸다. 처녀는 간지럼을 타는 것 같아 황홀해졌다. 푸른 용은 신과 달랐다. 처녀는 슬그머니 내려와 안개처럼 품었다가 사라지는 신보다 온몸이 살아 꿈틀거리는 푸른 용이 좋아졌다.
그러나 질투로 활활 타오르는 붉은 용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붉은 용은 처녀를 빼앗으려 들었다. 푸른 용도 처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욱더 꼭 껴안았다. 처녀도 푸른 용의 몸뚱이를 꼭 껴안았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붉은 용의 눈에 불이 번쩍였다. 붉은 용은 불을 뿜었다. 섬은 화염에 휩싸이기 일보 직전에 푸른 용은 차가운 물을 토해 불을 껐다. 섬은 삽시간에 불과 물로 초토화될 위기에 처했다. 두 용은 하늘과 땅에서 엎치락뒤치락 맹렬하게 싸웠다. 바닷물이 용솟음치기 시작하고 번개와 우레가 섬을 뒤덮었다. 지상의 소란스러움은 하늘의 신을 노하게 했다. 또 싸우느냐? 싸움을 그쳐라. 신은 호통을 쳤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만들 두어라. 둘 다 멈추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위로 만들리라.
붉은 용과 푸른 용은 싸움을 멈추었다. 처녀는 푸른 용의 등에서 내려 신의 곁으로 갔다. 신은 처녀의 손을 잡고 두 용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고?
당신은 왜 푸른 용에게만 저리 예쁜 여자를 주었소? 나도 저 여자를 가질 권리가 있소.
붉은 용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신에게 대들었다.
사단은 이 아이 때문이구나.
신은 탄식하며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처녀를 향해 물었다.
아이야, 애초에 너를 지상에 놓아두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랴?
처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 하랴?
여기 살게 해 주십시오.
좋다. 이 아이로 하여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겠다. 이의를 달지 않겠는가?
두 용은 서로를 바라봤다. 붉은 용은 씩씩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고, 푸른 용도 신의 처분에 따르겠다고 했다. 신은 처녀에게 두 용 중에 한 마리를 택하라고 했고 처녀는 푸른 용을 택했다. 붉은 용은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으르렁거림이 섬과 바다를 뒤흔들었다. 바다를 불꽃으로 만들어버리리라. 저 푸른 용과 처녀도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있는 불덩이를 목구멍으로 쏟아내려는 찰나 신이 소리쳤다.
아서라, 붉은 용아! 내 잘못을 바로잡겠다. 너는 바다와 이 섬을 다스리는 바다의 신이 되어라. 나는 하늘을 다스리고 너는 바다를 다스려라. 대신 푸른 용을 남자로 만들어 주겠다. 푸른 용과 이 아이는 부부가 되어 이 섬에 뿌리내리리라.
그리하여 푸른 용은 남자가 되어 처녀와 혼인을 했다. 주례는 하늘의 신이 맡고, 들러리는 바다의 신인 붉은 용이 맡았다. 붉은 용은 어쩔 수 없이 신의 뜻에 따랐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끓고 있는 불덩이는 식힐 수가 없었다. 짝사랑이란 옹이는 가끔씩 심술을 부렸다. 폭우와 소용돌이를 동반해 섬을 뒤엎었다. 섬은 가라앉을 듯이 심하게 요동쳤지만 푸른 용과 처녀의 사랑을 깰 재주는 없었다. 붉은 용은 탄식했다. 신을 원망했다.
붉은 용은 처녀에 대한 식힐 수 없는 사랑으로 애를 태우다 한 그루 나무가 되었다. 섬에는 표피는 매끄럽지만 흰빛을 띠고 잎은 타원형이나 단단하고 두터우며 표면이 기름을 바른 것처럼 반들거리는 나무 한 그루가 생겼다. 나무는 붉고 큰 꽃을 달았다. 붉은 용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사랑을 꽃으로 표현했다. 나무는 추운 겨울부터 늦봄까지 붉은 꽃을 피웠다. 꽃은 애잔했다. ‘나를 좀 봐주세요.’ 하는 듯 피었다가 송이 째 뚝뚝 떨어져 섬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동백은 그 나무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동백나무였다.
수 세기를 지나는 동안 섬은 푸른 용과 동백의 자손들이 사는 터전이 되었고 붉은 용이 화한 동백나무가 숲을 꽉 채웠다. 사람들은 붉은 용과 푸른 용의 우정과 동백을 향한 붉은 용의 사랑이 피어난 섬이라 하여 동백섬이라고 불렀다.
“섬이다. 저기가 동백섬?”
“어때? 붉은 용이 가엽지 않아? 나처럼?”
윤 선생은 내 눈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픽 웃으며 배에서 내렸다. 섬으로 오르는 좁고 가파른 비탈길 옆에 음식점 간판을 건 건물 한 동이 있다. 난간에 앉아 다리 쉼을 하며 바다를 봤다. 윤 선생은 붉은 용이 동백나무로 화했다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바닷속에서 붉은 용이 심술이 나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상점에서 동동주와 파전으로 요기를 하고 섬을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윤 선생은 내 손을 꼭 잡았다.
동백나무가 섬 전체를 뒤덮었다. 동백꽃이 피고 지는 철이면 섬 전체 어디를 가도 붉디붉은 동백꽃을 밟지 않으면 다닐 수 없을 것 같다. 흙빛도 꽃물이 들어 붉디붉었다. 붉은 용의 사랑이 동백꽃으로 화해 섬 전체를 감싸게 되었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지심도 동백꽃은 우람하다. 잠방이만 걸친 근육질 남자의 팔다리 같다. 해식으로 만들어진 절벽 위에 서 있는 동백나무들, 바다를 향해 기도하는 자세로 서 있다. 검붉은 동백꽃은 겹꽃이 아니라 홑꽃이다. 붉은 동백꽃이 모가지 째 뚝뚝 떨어진 오솔길을 걸을라치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 자락이 저려 온다. 서로 어우렁더우렁 칭칭 동여매어 자라지만 어쩐지 고독해 보이는 나무다. 거기에 아나콘다를 닮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반쯤 똬리를 틀고 반쯤 구불거리며 뻗은 동백나무는 나무 같지 않다. 짝사랑으로 애태우다 나무가 된 붉은 용의 화신 같다. 붉은 용은 동백나무로 화해 섬에 갇혀버렸지만 행복할까. 아름다운 동백처녀가 찾아와 쓰다듬어줄 때면 부르르 몸을 떨 것만 같다. 붉은 용이 동백꽃 같은 애잔한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금세 스르륵 몸을 풀고 나올 것만 같다.
동백나무를 쓰다듬으며 윤 선생이 들려준 전설을 곱씹는데 그가 나를 흔든다.
“또 다른 전설도 있어. 들려주랴?”
“공부 많이 했네. 들려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