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부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래여 Apr 21. 2024

내 친구 진이, 아쉽다.

내 친구 진이, 아쉽다.     



 진이가 왔다. 얼싸안았다. 액자에 넣어온 내 초상화와 환하게 웃는 부부 사진이 곱다. 진이는 화가다. 진이는 바람에 날리는 꽃눈을 보며 탄성을 지른다. 서울에도 벚꽃이 피기 시작했단다. 전국이 벚꽃 밭으로 변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벚꽃 축제 하는 지역도 많다. 남해 설전 벚꽃 길을 갈까. 합천호 벚꽃 길을 갈까. 나는 미리 머릿속을 굴린다. 집 앞에서 등을 넘어가는 벚꽃 길에서 사진을 찍는다. 


 내 친구 진이랑은 50년도 더 된 참 오랜 인연이다. 갈래머리 나풀거리던 소녀가 머리카락 희끗희끗한 노년에 접어들도록 너나들이하며 살 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한 생을 살면서 어찌 한 길만 걸어갈 수 있으랴. 인생은 어떤 길을 걷던 각자 한 길을 가는 셈이다. 지나온 길마다 그때 그 시절에 맞춘 삶의 희로애락이 깃들어 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중에도 우리는 하나였다. 수시로 만나고 근황을 주고받으며 나잇살 감아 온 세월이 아득하다.  


 누가 잘 살았고, 잘 살아가고, 누가 못 살고, 못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친구는 그 인생길의 동반자다. 내게 진이가 있어 고맙고, 진이도 내가 있어 고맙단다. 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우리는 하나로 걸어갈 것이다. 돌아보니 우리는 서로 삐진 적 없이 한결같이 서로를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어린 소녀가 처음 접한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틈에서 친구가 되어 주었고, 내 외로움을 보듬어준 친구였다.  


 또 한 친구가 있다. 이번에 그 친구도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눈도 멀고 몸도 만신창이가 된 친구다. 병원에서 요양원 재활병원으로 다시 집으로 또 재활병원으로 오가는 친구,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친구, 그녀의 남편도 갈래머리 소녀 때부터 알아온 친구다. 오월이 오면 그녀를 생각한다. 가장 먼저 결혼을 했었고, 진이와 나는 친구로 그녀의 결혼사진에 서 있다. 젊고 풋풋했던 얼굴을 생각한다. 


 그녀는 지난가을에 우리 집에 왔었고 하룻밤을 자고 갔다. 그리고 뇌수술을 했고, 그 후유증으로 아직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다. 그렇게라도 얼굴 보고 손잡고 같이 웃고 같이 지리산 단풍구경을 하고 왔었다. 그때 그녀를 배웅하며 이것이 마지막 만남은 아닐까. 염려스러웠다. 그 뒤 수술은 잘 됐다 하지만 중환자실에 오랫동안 거주했고, 면회도 사절이었다. 이번에는 얼굴 볼 수 있으려나 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아직 좀 더 기다리란다. 과연 사람구실 할 수 있도록 온전해질 수 있을까. 바람일 뿐이지 싶다. 


 인간은 그 바람 한 줄기로 살아갈 힘을 얻는지 모른다. 바람은 희망이다.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전화를 하고, 목소리에 활기를 넣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나도 무너진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는데 그녀에겐 고생 끝에 병만 왔다. 퇴직한 남편이랑 전원의 삶을 이어가고 싶어 했던 친구, 시골집도 마련하고 텃밭도 마련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친구, 그 마음 오죽하겠나. 한 생을 살아가는 길이 이러 듯 여러 갈래다. 어떤 길을 가든 내가 행복했고, 보람을 느낀다면 그 길은 나의 길이다.  


 진이는 당뇨, 고혈압도 가졌다. 우리 나이대면 흔한 병이 당뇨요 고혈압이다. 아직 농부와 나는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지만 언제 어떤 병마가 내 몸을 잠식할지 모른다. 심장병, 관절염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으니 나 역시 건강하지 못하다. 도시 생활이 체질이라던 진이도 우리 삶이 너무 좋단다. 눈을 뜨자마자 환한 꽃길을 본다며 이런 곳에 살면 돈이 없어도 부자로 살 것 같단다. ‘그래, 우리는 부자야.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으로 살아도 불편하지 않단다.’ 요즘은 야생에서 얻은 나물거리로 맛깔스러운 밥상을 차릴 수 있으니 말해 무엇 하리.


 농부는 산에 들어 홑잎과 머위를 가득 따왔다. 나는 삶아서 무치고 초장을 만들어 냈다. 진이는 갈래머리 때부터 내 자취방에서 내가 만들어 준 음식을 곧잘 먹었다. 내 수제비 맛을 못 잊겠단다. 저녁밥을 얼마나 맛나게 먹는지. 덕분에 나도 과식했다. 좋아하는 벗을 만나니 잃었던 입맛도 돌아오고, 무엇을 먹어도 맛나다. 정이 양념으로 스민 덕이리라. 


 다음 날 합천호 일대를 돌았다. 벚꽃에 취해, 푸른 물결에 취해 돌고 돌았다. 절정에 이른 벚꽃 길은 그냥 바라만 봐도 황홀하다. 바람이 휭 불어 줄 때면 꽃눈이 펄펄 날렸다. 어떤 표현이 알맞을까. 점심은 이름난 <찜> 집에서 해결했다. 마당가에 있던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싹 잘라버려 삭막해졌다. 오늘 아침에 잘랐단다. 나무를 심어 키우기도 힘들고 그 넓은 허리둘레가 되도록 자라 한 여름 나무그늘을 선사한 공은 어디로 갔을까. 느티나무 아래 놓였던 평상이 을씨년스러웠다. 


 손님들이 그 나무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담배꽁초를 아무 곳에나 던지는 것도, 가을이면 나뭇잎이 떨어져 수채 구멍을 막는 것을 치우기가 귀찮아졌다는 주인이다. 그 집의 운세가 기울어지면 어쩌나. 나무 한 그루의 기운으로 번창하던 음식점이 아니었을까. 집의 기운이 쇠하면 시나브로 손님이 떨어진다. ‘음식이 맛있잖아.’ 진이가 웃는다. 아무리 맛깔난 음식 맛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동티가 나면 방법이 없다. 손님은 여전히 미어터졌다. 점심 잘 먹고 나오면서 커다란 밑동만 남은 느티나무를 본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을 텐데. 아깝다.

 

 어쩌랴. 벚꽃 길 화려한 합천호를 휘돌아오며 잊었다. 

 진이랑 둘이 한 이불 덮고 누워 옛 추억 줍다가 자다가 깨다가 하다 날이 밝았다. ‘가을에 단감 먹으러 오께. 우야든 둥 건강하자. 그때는 애순이도 부르자.’ 다음 날 내 친구 진이는 떠났다. 아쉽다. 아주 많이.  

    2024.   4.

매거진의 이전글 마술 손이 따로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