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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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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17. 2024

마술 손이 따로 있을까.

마술 손이 따로 있을까.  

   

 밤사이 비가 왔다. 촉촉하게 젖은 숲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갈색이었던 숲이 연둣빛 이불을 깐다. 죽은 것처럼 마른 가지에도 잎눈이 트고 꽃필 준비를 한다. 꽃이 먼저 피거나 잎이 먼저 나거나 하는 것도 타고난 본분이다. 누가 강요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태어날 때 갖춘 기질대로 잎이 먼저 나는 것도 있고, 꽃봉오리가 먼저 맺히는 것도 있다. 사람의 성품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그릇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농부는 집에 오자마자 농사일 준비, 한식날 선산 사토까지 발바닥에 불난다. 일꾼을 구하고 잔디를 사 오고 괭이며 곡괭이 삽과 체소쿠리를 챙긴다. 새참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뒤란에 분리하여 쌓아 둔 쓰레기 포대를 치운다. 뒤란도 깨끗해졌다. 생활 쓰레기를 줄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사람살이에 생활쓰레기 배출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하루 종일 종종걸음 치던 농부는 텃밭에 들어선다. 풋풋한 시금치와 마늘을 본다. ‘저걸 뽑아내야겠는데.’ 내게 묻는다. ‘아직 고추 심을 때 멀었잖아요. 너무 일찍 심으면 냉해 받을 텐데.’ 내 말에 ‘거름을 내놔야 땅이 거름발을 받지.’ 두 말할 필요 없다. 칼과 비닐봉지를 챙겨 쪽마루에 앉는다. 


 농부는 시금치와 마늘을 몽땅 뽑아다 쌓아준다. 나는 시금치를 다듬는다. 겨우내 효자노릇을 한 시금치다. 시금치 한 단에 팔구천 원 할 때도 돈 들 일은 필요 없었다. 봄이 되자 골짝에 들어가 뜯어온 머위와 시금치나물이 수시로 식탁에 올랐다. 당분간 시금치는 저장해 놨다 먹어야겠다. 내가 시금치를 다듬는 사이 농부는 텃밭에 거름을 내고 두둑을 짓는다. 잘 삭은 검은 거름에서 김이 난다. 밑거름이 실해야 식물도 튼튼하다.


 반찬도 식구들이 많아야 푹푹 군다. 둘이 먹는 밥은 별 반찬 없어도 된다. ‘우리가 머 무 샀나. 너거가 마니 묵제.’ 생전의 시어머님 말씀이 지당하다. ‘쪼깬만 해라.’ 노래를 불렀던 시부모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일꾼 뒷바라지 하고 시부모님과 애들 뒷바라지할 때는 반찬을 해도 푸지게 했다. 장아찌를 한 항아리 담가놔도, 나물을 큰 양푼이 넘치도록 해도 모자랐다. 뭐든지 푸져야 직성이 풀리는 나보고 어머님은 ‘손은 작은데 하는 것을 보면 넘친다.’고 꾸지람인지 칭찬인지를 할 때가 많았다. 


 노인이 되면 적게 자주 먹어야 속이 편하고 그나마 늘 먹던 음식은 식상하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해도 한두 끼 먹고 나면 내치던 생전의 시부모님을 닮아가는 나를 본다. 어떤 음식이든 조금씩 제 때 만든 음식 제 때 먹고 치워버려야 한다.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기보다 한 끼 한두 가지 반찬만 만들어 식탁에 올리려고 노력한다. 농부도 반찬은 세 가지 이상 식탁에 올리지 말란다. 김치는 기본이다. 노인이 될수록 균형 잡힌 식단이 필요하다. 매끼 단백질 보충은 필수다. 어른들 모시면서 알게 모르게 몸에 밴 습관과 길든 것들이 있다. 왜 어른들이 반찬 까탈을 그렇게 부렸는지 내가 노인이 되어보니 이해가 된다.


 전기밥솥에 달걀을 씻어 넣고 물 한 컵 붓는다. 영양 찜 기능을 누르고 시간 조절을 한다. 구운 달걀을 만들어 놓고 먹는다. 이웃 닭 농장에 가서 사 온 신선한 달걀이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고 맛도 있다. 구운 달걀은 소금을 넣지 않아도 짭짤하다. 새참도 되고, 반찬도 된다. 하루에 두 개 정도 꾸준히 먹을 수 있어 좋다. 농부는 돼지뒷다리 한 판을 사 온다. 소금물에 담가 일주일 정도 숙성시킨 후 독에 넣어 훈제를 한다. 훈제 고기는 저장성이 좋다. 숯불 냄새가 배어 맛도 있고, 질리지 않는다. 돼지고기 특유의 느끼한 맛이 제거되어 담백하다. 며칠 후 여행 갈 때 밑반찬으로 챙겨 갈 참이다. 


 시금치를 다듬어 저장고에 넣었다. 풋마늘도 다듬어서 저장고에 넣었다. 농부는 풋마늘을 된장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시아버님은 밥상에 생마늘과 생양파가 떨어지면 불호령이 났었다. ‘아이고, 멈스리 난다. 이런 거 안 무도 오래 사는데.’ 노년의 어머님은 마늘과 양파 까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 두 가지는 반찬을 만들 때 필수 양념에 속한다. 마늘 농사지을 때는 풋마늘 고추장절임과 마늘장아찌는 필수였다. 생마늘이 떨어졌을 때는 마늘장아찌를 내거나 마늘종 장아찌라도 밥상에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주부의 손은 마술손이다. 음식 재료를 구하는 것도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종합 예술이다. 반찬 한 가지에도 몇 가지 양념이 보태져서 어우러져야 제 맛이 난다.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자연식일 때는 음식 맛 내기도 정성이고 음식의 궁합도 맞아야 제 맛이 난다. 여러 주부가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도 맛이 다르다. 주부의 손맛과 정성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손에서 기가 나온다고 하던가. 그 기가 정성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은 요리하는 남자도 많단다. 


 우리 애들도 요리 잘하는데.

 마술 손이 따로 있을까. 농부도 남매도 나도 각자의 마술 손 하나 가졌지 않나.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술 손을 가졌을 것 같다. 마술 손덕에 먹고살지 않나. ‘가자.’ 농부가 생각을 깬다. 수영장에 간다. 농부는 헬스를 하고 나는 물에서 논다. 덕분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수영장 덕에 산다는 말을 하고 또 해도 모자랄 것 같지 않다. 나이 들수록 운동은 필수라는데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 수영이다. 수영장에 다닐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수영장 다니는 것도 귀찮아질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괜찮다. 


 숲은 연둣빛 이불을 덮고 길섶에는 벚꽃이 휘날리는 봄날이 깊어간다.  

 202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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