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마무리>
4.
그날 아침 만수는 설사를 심하게 했다. 십장 김 씨에게 하루만 쉬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부지런하고 꾀를 부리지 않는 만수를 눈여겨봤던 십장은 파리한 그를 쉬게 했다. 한 조가 30여 명이다. 갱도에 들어간 사람 머릿수만 해도 백여 명은 된다. 만수는 다다미 몇 장이 깔린 합숙소로 들어와 누웠다.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나. 여기 있다가는 개죽음 당하는 수밖에 없다. 온종일 도시락 하나 받아들고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캤다. 살 길은 탈출하는 것인데 방법을 못 찾겠다. 일본 경비병의 삼엄한 감시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고된 노역으로 쓰러진 한국인 노무자는 무덤도 없이 사라진다. 하루에도 여러 명이 목숨을 잃는다. 탈출을 감행했다 잡혀와 총살당하고 구덩이에 던져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만수는 목침을 베고 설 잠이 들었다. 순임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만수는 순임이에게 달려간다.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순임아, 인자 우리 헤어지지 말자. 순임아!’ 순간 ‘꽝 꽈르르’ 비몽사몽간이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들렸다. 화산이 터진 줄 알았다. 이제 죽었구나. 만수는 벌떡 일어났다. 기숙사 창문으로 갱도 쪽을 봤다. 갱도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치솟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갱도가 무너졌다. 갱도가 무너졌다.”
“사람이 갇혔다. 사람이 갇혔다.”
만수는 직감했다. ‘다 죽었구나. 언젠가 해방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그 바람 하나로 견뎌온 동료들이 몰살당했구나.’ 혼란한 틈새를 타고 만수는 본능적으로 합숙소를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넜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었다. 곰이나 늑대가 출몰한다는 거대한 숲도 겁나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 살아 돌아가야 한다.’ 그 생각만 했다.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걸었다. 눈을 뭉쳐 허기를 달랬다. 북해도는 봄이라지만 밤이 길고 춥고 습했다. 가능하면 탄광촌에서 멀리가야 했다. 어머니가 소리쳤다. ‘만수야, 사람은 타고난 사주팔자대로 사는 기다. 호랭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똑 바로 차리면 살 길이 있다. 우짜든지 살아 돌아와야 한데이.’ 환청처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틀 밤낮을 헤매다 허기지고 추워서 풀숲에 웅크리고 앉아 잠이 들었다. ‘만수야, 일어 나거라. 일어나래도?’ 어머니가 등짝을 타악 때렸다. 만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때 저 아래 가물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만수는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빛을 따라갔다. 골짝으로 내려섰다. 골짝을 끼고 불빛을 따라 갔다. 눈밭에 굴리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면서 그 집 앞에 닿았다. 만수는 마지막 힘을 짜내 소리쳤다.
“누구 없소? 누구 없소?”
만수는 쓰러졌다. ‘여기서 죽는구나.’ 만수는 의식을 잃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만수는 부처님 앞에서 나던 향냄새를 맡고 눈을 떴다. 다다미가 깔린 방이었다. 몸을 움직여봤다. 만신이 부서진 것 같았다. 운신을 할 수 없어 ‘끙’ 앓았다. 화덕의 주전자에서 따뜻한 김이 솟았다. 화덕 옆에 기모노를 입은 노인과 젊은 여자가 다소곳이 앉아 만수를 바라봤다. 만수는 서양여잔 줄 알았다. 쌍꺼풀 진 눈, 가름한 얼굴, 햇볕에 살짝 그을린 것 같은 피부색에 큰 키였다. 그녀는 낯선 사람을 구하긴 했어도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젊은 여자가 주전자를 가리키며 마시는 시늉을 했다. 만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여인이 다가와 만수를 일으켜 앉혔다. 젊은 여자는 찻물을 마시게 했다. 선하고 따뜻한 눈빛이었다. 만수는 고맙다며 합장을 했다.
만수는 며칠을 앓았다. 의식이 오락가락 했다. 만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머니를 불렀다. 어떤 때는 순임이를 불렀다. 그때마다 노인과 젊은 여인이 다가와 만수를 보살폈다. 달포 정도 지나서야 만수는 겨우 몸을 추슬러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외딴 집이었다. 지리산 속에 있는 화전민촌과 비슷했다. 지리산보다 더 높은 설산이 내려다봤다. 만수는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요?”
젊은 여인에게 손짓 몸짓으로 물었다. 탄광촌에서 배운 일본말도 섞어가며 의사표시를 했다. 여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엇을 묻는지 알고자 하더니 드디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할린”
“여기도 사할린이라고?”
만수는 한숨을 쉬었다. 가와카미 탄광촌에서 얼마나 떨어졌을까. 그들이 신고하지 않을까. 만수는 불안했지만 어디로 가야하는지 길을 몰랐다. 노인은 누런 종이와 낡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군복을 입은 남자였다. 만수는 알아챘다. 노인의 아들은 군대에 차출되었다가 전사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누이 족 토모코와 에이코, 본토 사람은 나빠. 남편과 아들 뺏어갔다.”
“나는 타코, 가와카미에서 도망쳤다.”
만수는 그들에게 진실을 말했다. 탄광촌에서 한국인 광부를 타코라 불렀다.
눈은 연일 내렸다. 폭설에 갇혔다. 눈이 허리를 넘었다. 희한하게 개울물은 얼지 않았다. 따뜻했다. 만수는 눈을 치우고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빨리 건강해져야 돌아갈 길을 찾을 것 같았다. 일단 그들과 의사소통만 되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길을 나설 수도 없고, 세상 소식을 들을 수도 없었다. 세상 밖은 전쟁과 살육으로 피비린내를 풍겨도 세상과 격리된 그곳은 평화로웠다. 가난했지만 가난한 줄 모르고 젖어 사는 곳, 만수는 세상과 단절 된 그곳에서 토모코의 아들이 되고 에이코의 남편이 되었다. 만수는 에이코와 살을 섞었다. 순임을 안 듯이 그녀를 안았다. 에이코를 안고 순임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내 고향으로. 살면서 길을 찾을 생각이었다. 만수는 조금씩 일본 말에 익숙해져 갔다. 에이코에게 한국말도 가르쳤다.
그 산골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눈이 녹고 길이 열렸다. 벚꽃이 필 때 딸이 태어났다. 만수는 ‘미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미오! 아름다운 벚꽃’ 앙증스러운 아이를 안으면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착한 에이코, 친아들처럼 돌봐주는 친절한 토모코, 만수의 은인들, 만수는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보물 같은 아이를 어쩔까나. 모녀를 데리고 갈 수도 없기에 더 간절한 사랑이었다. 아니, 애절한 그리움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이었다. 타의에 의해 달라져버린 인생, 누구는 독립운동을 하다 죽고, 누구는 일본인에게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죽고, 탄광촌에서 매몰되어 죽고, 군수품 공장에서 혹사당하다 죽는 한국인들, 나라를 빼앗긴 울분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민초들, 그런 현실에서 뚝 떨어져 나온 자신의 삶, 천운이라고 하기엔 억울했다. 만수는 갈등이 심했다. 딸을 두고 떠날 수도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그러나 마음준비는 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자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 만수는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했다.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해다 쟀다. 살림살이가 포실해질수록 딸이 방긋방긋 웃을수록 귀향의 꿈은 멀어져 갔다. 가끔 노인이 산에서 내려가 세상소식을 주워왔다. 탄광 소식도 전해 주었다. 그때 갱도에 묻혔던 한국인 광부 중 살아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아라이 몽구도 죽었다.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는 것 같았다. 일본이 중국을 이겼다거나 가미가재 특공대가 미국 진주만을 공격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런 날이면 에이코가 술상을 차렸다. 만수는 미오를 무릎에 앉히고 술을 마셨다. 벚꽃 같은 딸을 희롱하며 ‘우리는 모두 일제의 희생자야. 당신도 나도 희생자라고’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도 했다.
미오가 세 살이 되었다. ‘아바, 아바’ 한국말을 배운 미오가 그를 부르며 아장아장 걸어 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벚꽃이었다. 벚꽃이 필 때 그에게 온 아이는 그가 떠나는 날까지 그의 품에서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미오는 아이누 족의 후손이라는 에이코를 속 빼 닮았다. 미오는 일본 아이 같기고 하고, 서양 아이 같기도 했다. 딸의 눈동자는 검푸른 바다 빛이다. 만수는 미오만 보면 세상근심이 몽땅 사라졌다. 벚꽃이 질 때처럼 순임의 얼굴도 벚꽃 잎처럼 흩어져가고 있었다. 단란한 가족, 만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행복감도 느꼈다.
그러던 차, 산에서 내려갔던 노인이 혼비백산해서 돌아왔다. 지진보다 더 무섭고 화산 폭발보다 더 무서운 것이 터졌다는 것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살던 도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만수는 직감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졌구나. 드디어 때가 됐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영영 고국으로 돌아갈 길은 막힐 거야.
1945년 7월을 깃 점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졌던 것이다.
만수는 마음이 급하다. 자칫 미적거리다간 사할린에 발이 묶일 것 같았다. 그때는 에이코와 어린 딸보다 어머님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급했다. 순임이는 지울 수 있을지 모르나 어머니는 지울 수 없었다. 청상과부로 만수 하나 바라보고 살아오신 어머니다. 새벽마다 장독간에 정화수 떠다 놓고 빌고 있을 어머니. 어머니 덕에 탄광촌 생지옥에서 살아날 수 있었고 사할린 골짝으로 피신하여 살아온 것이리라.
만수는 근방을 돌아다니며 어린 벚나무 한그루를 파 왔다. 햇볕 잘 들고 따뜻한 마당가에 심어 놓고 에이코에게 말했다.
“나,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가지 마. 여기 살아 미오랑 우리 가족이잖아.”
에이코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꼭 돌아가야 해. 갔다가 저 벚나무가 탐스러운 꽃을 피우면 돌아올게.”
며칠을 에이코는 울고 미오는 웃었다. 만수는 밤마다 에이코를 다독였다. ‘당신에겐 미오가 있잖아. 나는 잊지 않아. 내 딸을, 당신을, 다음에 찾아올게. 당신이 한국으로 나와도 되고. 여기 내 주소 적어놨으니 잊지 마.’ 에이코도 그가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모코 노인은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하며 비축했던 돈을 여비로 챙겨주었다. 가다가 먹으라고 찹쌀떡과 주먹밥을 싸 주며 말했다.
“내 아들 만수, 너는 내 아들이다.”
만수는 노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만수는 보퉁이 하나 등에 메고 집을 나섰다.
“아바, 아바”
등 뒤에서 딸이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만수는 차마 떨쳐버리기 어려운 부정을 남기고 도망치듯 사할린을 떠났다.
그해 8월 15일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항복 소식이 북해도 전역까지 전해졌다. 탄광촌에 살던 한국인은 만세를 불렀다. 회사 사장은 한국인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선처를 해 주겠다고 했다지만 사할린 탄광촌에 억류된 강제 징집당해 온 한국인은 발이 묶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할린이 승전국 소련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었다. 만수도 서두르지 않았다면 영영 나오지 못할 곳이 된 사할린이었다.
일본 열도는 들끓고 있었다. 고국으로 떠나는 한국인의 귀향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만수는 한눈팔지 않고 길을 찾아 북해도를 벗어났다. 관부연락선이 오가는 시모노세키 항에 닿았다. 항만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피난보따리를 이고 진 초라한 사람들, 강제 이주 당했던 한국인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돌아오는 아내와 자식들, 탄광촌이나 채석장에서 목숨 부지를 하고 돌아오는 한국인이었다. 만수는 관부연락선 3등석 표를 샀다. 노인과 에이코가 찔러준 노잣돈이 없었다면 밀항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만수는 관부 연락선에 올랐다. 배에 승선하자 숨통이 튀었다. 드디어 집으로 가는구나. 여기저기서 들리는 한국말이 어쩜 그리도 반갑든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보였다. ‘나는 살아 돌아갑니다.’ 외치고 또 외쳤다. 만수는 태평양을 바라봤다. 흑진주 같은 눈빛이 따라왔다. ‘내 언젠가는 너를 보러 오리라. 딸아, 아부지 잊지 마라. 사랑한다. 우리 딸!’ 만수는 멀어져가는 일본을 바라봤다. 예리한 칼이 가슴을 죽 긋는 것 같았다. 부두에서 미오를 안은 에이코가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미오! 내 아름다운 사할린의 꽃.’ 만수는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수평선 너머 사할린에 닿기를 바라면서.
배가 부산항에 닿았다. 부산항도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눈 뜨고도 코 베일 수 있다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만수는 고국의 산하를 둘러보며 감개무량했다. 지리산 실골을 떠난 지 5년 만이었다. 스물다섯 살이 된 만수는 세상 보는 눈도 달라졌다. 무슨 짓을 하든지 살아낼 자신이 있었다.
“드디어 나는 살아 돌아 왔어. 엄니. 순임아, 기다려라.”
5.
“여보, 메를 지을까요?”
아내가 물었다. 상해는 시계를 봤다. 밤 열 시 반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밥솥에 취사를 누르고 미리 끓여둔 탕국을 데운다. 상해는 거실 복판에 놓였던 술상을 치우고 바닥에 걸레질을 한다. 상미는 미리 챙겨놓은 제기를 닦고 자형은 병풍을 가져다 창 앞에 세운다. 병풍 앞에 커다란 제사상이 놓인다. 상해는 행주로 제사상을 닦고 거기에 어머니아버지 신주를 모신다. 아내는 준비해 놓은 제수거리를 꺼낸다. 아내가 크고 작은 제기에 음식을 담아주면 누나는 상해에게 건넨다. 차려진 제사상이 걸다.
“올해도 상다리가 부러지겠네. 물가도 비싼데 조금씩만 하래도.”
“조금씩 한다고 해도 그게 쉽지 않아 예. 가짓수가 많아서.”
“가짓수를 확 줄이지. 제사는 산 사람을 위한 거라는 말도 있잖아. 이렇게 푸짐하게 차리니 나야 고맙지만 형편 따라 해도 된다. 이제 동생도 백순데 돈 아껴야지.”
“누나 말도 일리는 있지만 괜찮습니더. 집사람이 알아서 할겁니더.”
“아부지는 좋겠다. 이런 효자 아들과 며느리 둬서.”
상해는 제사상 앞에 앉았다. 부모님의 신주를 바라보고 있자니 생전의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추억담 때문이다. 아버지 돌아오신 날 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식상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선 곰방대에 담배를 재우고 불을 붙여 한 모금 맛있게 빤 후에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내가 말이다. 그때 생각만 하모 가심이 벌렁벌렁 한다. 해방 되고 올매 안 됐을 때라. 나라가 해방이 됐다지만 나는 하나도 안 반갑더라. 박 씨 그놈이 내 아들이 죽었다 안 카나. 아이고, 날벼락 맞아 죽을 넘. 그래도 나는 안 믿었제. 지 놈이 내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되거든. 저승 가서 저거 애비를 무슨 낯으로 볼라꼬. 그날은 하도 맴이 싱숭생숭 해서 담뱃대 물고 마루에 앉아 있었제. 멀리 가물거리는 강물이 내 눈물 같더라. 그때 말이다. 거짓말같이 ‘엄니, 댕겨 왔습니더.’ 함서 어떤 넘이 마당에 쑥 들어오는데 어깨는 딱 벌어졌지만 인도지 같은 기라. ‘뉘요?’ 항께네 뛰어와서 나를 덥석 안는데 고마 뒤로 해장작 팰 뻔 안 했나. 그런데 말이다......”
할머니는 곰방대를 뻐끔뻐끔 빨았다. 할머니 볼이 움직거리는 것이 왜 그렇게 슬퍼 보였는지. 죽었다던 자식이 살아왔는데 할머니는 무엇이 그리 슬픈 것일까. 할머니는 상해가 열세 살 때 어머니 품에 안겨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몇 달 뒤 벚꽃이 피자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날마다 할머니 무덤가에 앉았다가 벚꽃이 지자 또 떠나셨다. 그 뒤에도 할머니 제삿날만은 꼭 돌아오셨다. 제사만 지내고 새벽같이 사라지셨다.
아버지는 할머니 제삿날이면 소리 없이 우셨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할 때면 눈물방울이 술잔에 뚝뚝 떨어졌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엄니, 사는 기 다 헛것입니더.’ 하셨다.
언제였던가. 방랑을 끝낸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와 지내실 때였다. 벚꽃이 피자 아버지는 벚나무 아래 앉아 계셨다. 나도 아버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아버지는 뜬금없이 말씀하셨다.
“제사는 차린 음식보다 얼마나 정성을 들였느냐에 달려있다. 맹물 한 그릇을 놓고 절을 해도 내 마음을 다한다면 혼백은 고맙다 할 것이다. 나는 어무이께 불효를 저질렀다. 평생 마음 고생시켜 드린 것이 한이 된다. 너는 내 제사에 물 한 그릇만 떠 놔도 오감타. 다 내가 모지랬던 탓이다. 내 탓이다.”
“거기 와 아부지 탓입니꺼? 일본 탓이지예. 지금도 보이소.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도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 아입니꺼. 일제강점기에 친일파 후손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답디더. 독립 운동가 후손은 못 먹고 못 산답디더. 아버지도 남 대신 북해도 탄광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지만 보상도 못 받았잖습니꺼. 남의 이름으로 갔다고 안 된다 했다면서 예. 힘없는 백성들 마구 잡아다가 강제노역 시킨 일본은 지금도 반성 안합니더. 그때 강제 징용에 동원됐다 타국에서 죽은 사람이 올매나 많습니꺼. 그 사람들 망가진 인생을 누가 알아주기나 합니꺼? 에맬무지로 생각하는 기 신상 편하겠지만 사람인데. 아부지 일이라서 그런지 저는 속에 천불 납니더.”
“그래, 인자 너거들 몫이제. 힘 있는 나라로 맹그는 것도. 심지 굳은 대통령을 뽑는 것도 다 국민들 몫이제. 언젠가는 옳은 해법이 나오것지. 친일잔재도 청산하고 왜곡된 역사도 바로잡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제. 조금씩 풀어지긴 하겠지만 아직 멀었다. 벚꽃이 탐 곱구나. 집에 있으니 세월이 참 안 간다. 내년에도 저 벚꽃을 볼 수 있을라나. 내 죽은 후에도 벚나무 베지 마라. 꽃이 피면 누가 올랑가.”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0년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해방이 된 그해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마당가에 벚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아버지는 벚꽃이 피면 집에 돌아왔다가 벚꽃이 지면 집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녔다. 할머니와 엄마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실골에서 늙어갔다. 누나와 내가 태어나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의 역마살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역마살은 일흔 살이 되어 끝났다. 병이 들어 집에 돌아왔다가 3년 후 돌아가실 때까지.
지금도 우리 가족은 벚꽃이 필 때를 기다리다 벚꽃이 피면 지는 것을 아쉬워한다. 아버지가 평생을 그리워하던 ‘미오누나!’를 생각하면서. 사할린의 그 집에도 고목이 된 벚나무 한 그루 아직 있지 않을까. <끝>
*해장작 : 마르지 않은 장작, 경상도에서 너무 놀라 뒤로 벌렁 넘어지는 것을 해장작 팬다고 함.
*인도지 : 경상도에서 얼굴이 햇볕에 타서 검은 사람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