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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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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y 23. 2024

설구화가 웃는다.

설구화가 웃는다.


    

  잔디를 깎은 너른 마당은 깔끔하다. 하얀 꽃을 피우던 토끼풀 꽃도 사라졌다. 바람 따라 꽃 향기가 날아온다. 이팝나무 꽃향긴가. 불두화 꽃향긴가. 내가 알고 있던 우리 집 불두화가 설구화란다. 설구화와 불두화는 꽃은 비슷한데 잎사귀가 다르단다. 자세히 살펴보니 불두화가 아니라 설구화 같다. 오래전 집을 짓고 마당을 다듬을 때 삽짝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마주 보게 야생 꽃나무를 심었다.


  그때 엇비슷하게 마주 보도록 두 그루를 심었었다. 꽃나무는 잘 자라주었고 세월이 갈수록 탐스러운 꽃을 피웠다. 몽글몽글한 하얀 꽃이었다. 삽짝에서 보면 오른손 편의 것은 잎사귀가 타원형이고 줄무늬가 있었다. 왼손 편의 것은 엄지와 약지만 벌리고 세 손가락은 모은 모양이었다. 사월 말부터 우리 집은 온통 흰 꽃 천지였다. 나는 오른손 편의 꽃을 불두화로 왼손 편의 꽃을 불단화라고 알고 있었다. 부처님 머리모양을 닮은 꽃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루는 농부가 ‘한 그루는 파내자. 흰 꽃이 많으니 보기 싫네. 살빡에 들어오는 사람도 안 보이니.’ 그렇게 하여 왼손 편의 불단화를 파냈다. 삽짝이 훤해졌다. 남은  불두화는 해마다 무성해져서 지금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풍선기구만큼 큰 꽃무더기가 되었다. 꽃의 모양은 수국과 비슷하다. 꽃이 맺힐 때는 연둣빛이다. 그 꽃의 몽우리가 자라면서 색깔이 옅어져 만개했을 때는 눈처럼 하얗다. 설구화는 마지막에 불그레하게 변한다지만 우리 집 불두화는 초록색으로 몽우리가 맺혀 자라면서 연두색으로 옅어지다가 하얗게 변해 꽃송이 자체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야생이라서 그럴까.

 

 어제 40년 지기 후배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었다. ‘언니 저 꽃 설구화래. 불두화는 잎사귀가 달라.’ 네이브 검색결과를 첨부했다. 설구화란 말은 처음 들었다. 잎사귀를 보니 설구화였다. 몇 년 전 파내버린 불단화가 불두화라는 것을 알았다. 설구화든 불두화든 어떤가.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내 마음이 푸근해지고 맑아지면 어떤 꽃이든 아름다운 꽃이다. 마음을 여는 향기 나는 꽃이다.

 

 우리 주변에 널린 야생화의 이름은 학명과 다른 것이 참 많다. 지역에 따라 다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조팝나무 꽃을 싸리 꽃, 명자 꽃을 처녀 꽃, 배롱나무 꽃을 생이(상여) 꽃, 이팝나무 꽃을 밥풀 꽃, 진달래를 참꽃, 철쭉꽃을 개꽃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 야생화가 지역 사투리로 불리는가. 촌로들이 부르는 꽃 이름은 순수 우리말이다. 모양과 생김새, 냄새에 따라 지은 이름은 참 정겹다. 학명으로 정해진 이름을 촌로들이 어찌 알겠나. 누가 예쁜 야생화를 보고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입소문을 타고 고착화된 것이지 싶다.

 

 소쿠리를 들고 마당에 나섰다. 부드러운 세치 혀 같은 찻잎을 딴다. 손톱 밑이 파릇해지면 허리가 너끈해 온다. 소쿠리 가득 찻잎이 담기면 자꾸 코를 큼큼 거린다. 상큼한 찻잎의 풋내가 좋은 거다. 연휴를 맞이해 찻잎을 따 주러 오겠다는 친구를 생각한다. 전형적인 도시 여자인 그녀가 벌레가 기어 다니는 차밭에 들어 과연 차를 몇 잎이나 딸 수 있을까. 밤에도 이층 방에서 나랑 같이 자도 무섭다는 친구다. 그 친구가 차밭에 서서 차를 딸 수 있을까. 거미나 애벌레만 봐도 기겁을 할 것이다. 지네나 뱀을 보면 기절하지 않을까.

 

 친구에게 문자를 날렸다. ‘그냥 와서 철쭉 구경이나 하러 가자. 찻잎 따는 것, 차 덖는 것은 포기하고. 나 혼자 쉬엄쉬엄 하면 된다. 덖음 차랑 황차 조금만 만들어 아껴 먹으면 된다.’ 친구는 생각해 보겠단다. 회색의 서울 도심이 자꾸 싫어진다는 그녀, 시골 정취를 그리워하는 것도 나이 듦이다. 황매산 철쭉이 눈에 선하다. 우리 집 뒷산 한우산도 아름다운  철쭉꽃밭일 것이다. 친구가 오면 꽃구경이나 다녀야지.

 

 찻잎을 대소쿠리에 담아 그늘에 넌다. 시들어지면 비벼서 널어 자연발효를 시켜 볼 생각이다. 해마다 하는 차, 할 때마다 이런저런 방법을 써 보는 것도 아직 제대로 된 차 맛을 못 내기 때문이다. 내 맘에 쏙 드는 차 맛을 어떻게 하면 낼 수 있을까. 귀한 차 맛을 보고 싶은데. 한승원의『초의』를 편다. 차를 덖는 작가 부부의 서문을 읽는다. 한승원 작가는 차의 대부였던 초의선사를 어떻게 소설화했을까. 읽어보면 알겠지. 삽짝에서 설구화가 방실방실 웃는다. 우리 집 설구화는 여태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냥 불두화라고 하자.

              202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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