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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l 04. 2024

아버지의 빈자리

<짧은 소설. 처음>

<짧은 소설>     

 아버지의 빈자리     


 코로나 팬데믹 시절에 여행도 갈 수 없고, 학교 수업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심심하던 차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집 아래채에 젊은 부부가 세를 들었다. 이삿짐도 단출했다. 아이도 없었다. 엄마는 무척 흡족한 눈치다. 요즘 젊은이는 대부분 원룸이나 아파트를 선호하는데 낡은 단독주택에 셋방을 구하는 그들이 기특하다 했다. 이웃집 할머니에게 엄마는 ‘남자는 약골이고 여자는 얌전해요. 나이 차이는 좀 나는 것 같지만 궁합은 좋은 것 같아요.’했다. 맞벌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증금 5백에 매달 30만 원 받던 월세도 깎아준 눈치다. 문제는 젊은 부부 옆방이 내 공부방이라는 것에 있다. 


 나는 왕성한 호기심을 억누른 채 엄마에게 불만을 토했다. ‘내 공부에 지장을 주면 엄마가 책임져’ 엄마는 웃기만 했다. ‘불편하면 누나들 방으로 옮기든가.’ 내심 엄마는 내가 안채의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 하는 눈치다. ‘싫어. 엄마 옆에 있으면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단 말이야.’ 엄마의 관심이 내겐 불편하다. 나는 중학생이지만 숫기가 없단다. 계집애처럼 얌전하다는 뜻이다. 나는 공부보다 소설책을 더 좋아하는 문학 소년이기도 하다. ‘아들, 공부는 중간만 해도 괜찮아.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엄마의 바람이었다.  


 원래 아래채는 방 한 칸에 창고를 겸하고 있었다. 그 방은 아버지의 방이었다. 아버지는 어시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아버지의 몸에서는 늘 생선비린내가 났다. 생선비린내를 풍겨도 나는 아버지를 좋아했다. ‘뼛골이 부서져라 일하고 와도 우리 아들만 보면 피로가 확 풀린다.’는 아버지셨다. 그 아버지께서 이태 전에 돌아가셨다. 새벽에 들어온 어선에서 생선 하역작업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엄마는 환갑 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박복한 양반이라고 한다. 내가 대학생이 되는 것을 못 봐서 그렇단다. 나는 늦둥이다. 내 위로 누나가 둘이지만 시집을 갔다. 누나들이 거쳐하던 방은 빈방으로 남아있다.  


 다행한 일은 어시장 번영회에서 재해보험에 들어있었다.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탔다. 거액이었다. 졸지에 가장이 된 엄마는 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보험금에서 조금 떼어 아래채를 개조했다. 창고를 고쳐 방과 부엌, 화장실 겸 목욕탕을 넣었다. 방 두 개짜리 독채가 된 것이다. 안채와 마주 보는 방은 내 공부방이 되었고, 안채와 먼 쪽 방은 셋방이 되었다. 그 셋방의 첫 입주자가 젊은 부부였다. 아저씨는 중소기업에 다닌다고 했다. 엄마는 ‘요즘 젊은이 같지 않아. 저 참한 색시를 집에 들어앉힌 걸 보면. 신혼이라는데 짐이라곤 딸랑 가방 두 개야. 조용해서 좋다. 우리 아들 공부에 지장은 없겠다.’면서 좋아했다. 


 셋방 아저씨는 여섯 시가 되면 어김없이 집에 왔다. 셋방 아줌마는 다섯 시 반쯤 되면 저녁을 준비했다. 지글지글, 뽀글뽀글, 생선도 굽고, 쇠고기, 돼지고기 굽는 냄새도 나고, 된장찌개 냄새도 났다. 아줌마의 옷도 바뀌었다. 목욕 가운 같은 헐렁한 원피스를 입었다. 그 시간이면 나도 안채에 올라가 엄마랑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공부방으로 돌아온다. 컴퓨터를 켠다. 낮에 줌으로 받은 숙제를 하거나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거나 소설책을 읽다 잠자리에 드는데 새벽에 소피를 보러 일어날 때가 있다. 셋집 벽을 통해 여자의 앓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가 아픈 것 같았다.  


 그날은 엄마가 모임에 갔다가 저녁 먹고 온단다. ‘아들, 미안, 자장면이나 피자 시켜 먹을래? 밥값 두 배 줄게.’ 했다. ‘좋지.’ 나는 마침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는 중이었다. 말초신경이 곤두서고 숨결은 가빠져 오고 손장난으로 만족하기도 벅찰 때 벽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오빠아~~~ 아야야, 끙끙 흑흑, 앓는 소리에 이어 찰싹찰싹 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셋집 부부가 싸우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거칠게. 던지고 구르는 소리가 났다. ‘어쩌지? 살인나는 거 아닐까.’ 벽을 칠까? 엄마를 부를까? 경찰을 불러야 하나? 머리를 굴리다 일어났다. 사태 파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와 뒤꼍으로 돌아갔다. 고양이 걸음이었다. 셋방 부엌문을 통해 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엌문에 달린 유리창에 눈을 댔다. 부엌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고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거기 남녀가 벌거벗은 채 뒹굴고 있었다. 나는 숨도 못 쉬고 발걸음을 뗄 수도 없었다. 벌거벗은 여자를 처음 봤다. 여자의 다리 사이 검은 거기에 남자의 머리가 박히고 남자의 들린 엉덩이 아래 거대한 그것이 흔들렸다. 끙끙 앓던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엉금엉금 기어 나와 안채로 달음박질쳤다. 엄마가 돌아왔지만 잠을 설쳤다. 그날 새벽에도 여자는 끙끙 앓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마주친 여자는 내게 ‘누나라고 불러. 영화 좋아하지? 놀러 와도 돼.’ 천연덕스러웠다. 나는 셋집 누나만 보면 하초가 빳빳해지고 얼굴이 빨개졌다. 누나는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이 이마에 알밤을 주기도 하고, 슬쩍 내 귀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해. 알지?’ 내 귀에 더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젊은 부부가 세 든 지 서너 달쯤 되었을까. 밥상머리에 앉았던 엄마는 셋방 쪽으로 눈을 흘기며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참나. 너 공부방 옮길래?’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던?’ 물었고,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시침을 뗐다. 그 뒤로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더 컸고 더 자주 들렸다. 내 귀는 밤마다 셋방 얇은 벽에 붙고 내 손은 자연스럽게 수음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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