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하랴.
소나기가 올 것 같다. 여성 바우처 카드를 들고 농협 마트에 갔다. 몇 가지 사지도 않았는데 십만 원이 넘는다. 마트에서 5만 원 이상 사면 경품 추천을 한다. 즉석에서 긁는 복권이다. 경품권 두 장을 뽑아 십 원짜리 동전으로 긁었다. ‘에게, 겨우 이거야?’ 물티슈 두 개를 받았다. 경품에는 믹스 커피도 있고, 휴지도 있고, 라면도 있는데. 1등은 삼성 냉장고든가. 겨우 물티슈 두 개를 받으니 아쉽다. ‘내게 있는 운이 요만큼이겠지. 물티슈라도 공짜잖아. 잘 쓰면 돼.’ 마음을 달랜다.
딸은 여름옷을 챙기러 자취집에 갔다. 돈벌이 따라갔던 자린데 돈벌이 접어버렸으니 그곳에 있을 필요도 없다. ‘싹 정리하고 들어 온나.’ 시댁을 정리해서 딸의 거처로 삼을 생각이다. 살가운 딸은 우리 부부에게 힘이다. 가난한 집에 입 하나 든다고 하지만 입 하나 더 있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엄마, 돈 떨어지면 벌 테니 걱정 마.’ 딸은 여유롭다. 천복을 타고 난 딸이다. 제 밥벌이할 능력은 있다고 자신만만한데. 나잇살 느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지. 나는 좋으면서도 걱정스러운데. 은근히 딸의 귀촌을 환영하는 농부다. 아내랑 해야 할 농사일을 딸과 하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딸은 가는 길에 동생을 보고 가기로 했다. 아들은 밀양 연극 촌에서 학생들과 이동 학습 중이다. 힘도 보태줄 겸 학생들에게 우리 지역 특산품 망개떡도 선물할 겸 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망개떡을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라고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작은 정도 때론 힘이 될 수 있다. 나도 흐뭇했다. 아들을 행복하게 해 준 것 같아서.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딸이 없는 하루가 짧다. 멍 때리기 하며 숲을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은 잘 간다. 수북하게 쌓인 읽을거리가 눈에 들어오지만 잡은 소설책도 진도가 안 나간다. 소설책 한 권 들면 하루 만에 마지막 장을 덮을 정도로 독서광이던 나도 나잇살은 못 이기나 보다. 우선 눈이 피로해서 오래 볼 수가 없다. 눈이 짓무르는 경험을 한 후라 조심스럽기도 하다. 책 보는 대신 푸름을 본다. 이런 날 바닷가 그늘에 앉아 그냥 바다를 바라보면 좋겠다.
그 바람에 딸과 삼천포를 찾아갔었지만 노산공원 의자에 앉아 시간을 잊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남강 천을 따라가 볼까. 유유히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평화로워진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그냥 바라보는 것에 자꾸 매혹된다. 눈이 시리면 눈을 감으면 된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의 풍경은 움직이고 있다. 눈을 뜨고 있는지. 눈을 감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다.
여성 바우처 카드 덕에 푸짐하게 장을 봤다. 혼자 있는 어미가 걱정된다며 저녁에 돌아오겠다는 딸이다. 딸을 위한 찬을 만든다. 돼지고기수육을 했다. 딸은 늦을 것 같다며 오다가 저녁 먹고 오겠단다. 돼지고기 수육 한 덩이 썰어놓고 묵은 지 씻어 걸쳐 먹었다. 혼자 먹는 밥도 맛있다. 늦게 온 딸은 저녁을 안 먹었단다. 수육을 했다며 내놓자 맛있다며 탄성을 지른다. 자식 입에 들어가는 밥숟가락만 봐도 배가 부른 것이 모정이라 하던가. 하여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자식들 오면 부엌에 들어서는 모양이다. 며느리 밥은 앉아서 받아먹고 딸 밥은 서서 챙겨 먹는 것 같다. 아직 며느리가 없으니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편이 없어도 남편의 빈자리를 느낄 틈이 없다. 딸과 노닥거리다 보면 하루가 금세 간다. 두 어른 돌아가시고 나니 시간이 남아돌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잘 사는 건지 아리송하지만. 어쨌든 머릿속 쥐 날 일도 없고, 간섭할 사람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오라 가라 할 상전도 없으니 살맛이 나야 하는데 왠지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다. 이렇게 만 포장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이 이는데 무얼 하랴.
202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