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가로서 걸어가는 길>
2. 작가로서 걸어가는 길
작은 산촌에 터 잡고 산지 30년이 넘었다. 촌부로 자리매김하기도 벅찬 나날이었다. 그 속에 젖어 살 수도 있었다. 내 사주팔자려니 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내가 쓰는 글이 허섭스레기 같을 때도 있었다. 나 죽고 나면 쓰레기밖에 더 될까. 절망할 때도 있었다. 나는 왜 쓰는가.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 책과 글이 나를 살렸다. 틈만 나면 책을 잡는 습관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중독되었다. 왜? 살기 위해서.
사막 가운데 버려진 것 같을 때 책이 있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온종일 농사일에 치어 허덕대다가도 책을 잡으면 눈이 빛났고, 글을 쓰면 몰입의 경지에 들었다. 고단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직 내가 쓰는 글만 남았다. 작은 동네 사람들 살아온 이야기, 너나들이에 끼어든 우스개 하나도 뇌리에 박혔고, 내가 만진 흙의 감촉, 어린 모종의 파리함, 그들이 피워내는 꽃과 열매, 땅을 일구는 사람들의 땀 냄새, 작은 벌레조차도 내겐 눈부신 세계였다. 촌부의 삶은 허영이 끼어들 틈이 없다.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내 글의 바탕이 되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엇박자로 보기, 드러난 겉모습보다 숨은 내면보기, 작가는 때론 세상과 타협하기도 하고, 세상을 거부하기도 한다. 나는 온전한 것보다 불안전한 것에 호기심이 발동한다.
왜 사람은 각자도생일까.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고,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것을 인식할 때마다 더불어 사는 것이 뭔가 고민하게 된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남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은 뭘까. 소설이든 시든, 수필이든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것의 한계를 생각한다. 현실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하는 작가도 있고, 과거를 끌어들여 현실의 벽을 넘으려는 작가도 있다. 사실주의 문학이든, 순수 문학이든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내 속에 든 무언가를 끌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은 인문학의 부재란다.
사람의 도리보다 돈이 신이 된 사회라는 인식이 팽배한 현실이다. 내가 쓰는 글이 돈과 연결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떤 글을 써야 돈이 되는가. 고민한 적도 있다. ‘책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옛날 어른들 말씀을 새길 때도 있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어떤 재주나 재능을 가지고 나온다고 한다. 내게 글쓰기 재능을 준 것도 조상의 음덕일까. 글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고 글을 쓸 수는 없다. 내 안의 결핍이 책을 읽게 만들었고, 내가 모르는 세계에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문리가 틔고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진다. 편협한 독서가 아니라 방대한 지식의 창고를 더듬다 보면 내 안에 씨앗 하나 생기고 그 씨앗은 독서란 영양분을 취해 자란다. 세상이 요지경 속이라도 내 속에 든 씨앗은 자란다.
올곧다는 게 뭔가.
옳고 그름의 판단도 작가의 몫이다. 사회의 잣대에 나를 댈 수도 있고, 사회의 잣대를 내 식으로 구부리거나 잘라낼 수 있는 것도 작가의 역량이다. 시대상황에 적응하기보다 부적응 자가 작가 아닐까. 보편적인 삶을 깊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류에 편입하기보다 나만의 올곧은 기개를 펴는 일도 오늘을 사는 작가가 고민해야 할 일이다. 얼마 전, 울릉도를 여행할 일이 있었다. 강풍 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배 멀미와 거리가 멀게 살아온 나는 배 타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파고는 2,3미터를 오르내렸고, 멀미 안 하는 약을 먹은 사람도 배 멀미를 했다. 큰 배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비명을 질렀고, 성난 파도가 창문을 거칠게 때릴 때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물 위에 둥둥 떠서 바람이 바다를 희롱할 때마다 얼굴이 노랗게 떴고, 모두들 뱃속에 든 노란 물까지 쏟아냈다. 배가 뒤집히면 어쩌나? 그 생각이 들자 내 눈앞에 뒤집힌 <세월호>가 떠올랐다. 배에 탔던 승객들의 아비규환이 재현되었다. 그들은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요행을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 부처님, 천지신령님, 신의 이름으로 기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이구나.
생각했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어떤 한계에 부딪히면 금세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끝까지 살아나갈 방도를 찾는 사람도 있다. 살려고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다. 작가도 그 살아남으려는 사람이 아닐까. 작가는 어떤 사건을 겪을 때 나보다 모두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든, 복잡한 사람이든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일이 삶이고 그 삶의 내면을 끌어내어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작가다. 무사히 다섯 시간의 배 멀미에서 벗어났을 때 끝없이 펼쳐진 검푸른 바다를 봤다. 나는 이 경험을 어떤 식으로 살려낼 수 있을까. 울릉도에는 소설의 소재가 무궁무진했다. 거기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깊이 들어다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섬을 여행하면서 내 머릿속은 끊임없이 글감의 소재와 주제를 찾고 어떻게 엮어갈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다.
작가의 정체성이랄까.
2024년, 대한민국 정치계는 혼란스럽다. 야당, 여당, 빨간 당, 파란 당, 지역 간의 파벌 싸움도 여전하다. 검찰 공화국이란다. 지식층에서 대통령 탄핵이 거론되고 대통령이 민생을 제대로 파악도 못하는 상태라는 말도 회자된다. 사실 국민 경제는 열악해졌고, 강풍에 휘둘리는 배처럼 휘청거린다. 그 와중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사전 투표를 했던 나는 투표 결과를 지켜보며 속상했다. 경직된 국민의 사고방식에 분개하는 나를 되새김질을 했다. 과연 내가 분개하는 것은 내가 지지하는 당이 압승을 못한 것에 대한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지지하는 당이 올곧은 당인가. 나도 편 가르기에 침해당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가 대통령이 됐든, 누가 국회의원이 됐든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시중에 떠도는 공공연한 말을 생각한다. 나도 그런 아류에 편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럴 때 작가로서 나는 오늘을 고민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