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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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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ug 18. 2024

그녀와 한 나절

그녀와 한 나절     



 후덥지근한 날이 계속된다. 습도가 높아도 창문이란 창문은 활짝 열어둔다. 나는 냉방기 바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답답해서 그렇다. 청정구역에 살면서 땀 좀 흘리면 어떤가. 여름은 더워야 제 맛 나는 계절 아닌가. 세계 기후가 요동을 친다. 중국에는 둑이 터지고 강이 범람해 인명과 재산 피해가 속출하고 미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는 폭염으로 인명이 죽어나간단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도 기후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 빙하가 녹고 사막이 늘어나는 추세다. 


 농부는 잔디를 깎고 풀을 친다. 시골의 여름은 풀과의 전쟁이다. 사방이 푸름으로 뒤덮여 있다. 첫 매미 울음소리를 들었다. 목이 쉰 듯 탁한 소리다. 며칠 지나면 제 목소리 찾겠지. 쇳소리를 내는 쇠 매미보다 맑은 소리를 내는 참 매미의 울음소리가 좋다. 매미가 울면 한여름이다. 한 철 열심히 울다가 가는 매미의 일생을 생각하며 사람은 백 년을 사니 긴 생이라는 생각도 든다. 몇 백 년을 사는 나무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어떤 마음일까. 


 보랏빛과 하얀 도라지꽃이 피었다. 하얀 깨꽃도 피었다. 주홍빛 능소화도 흐드러졌다. 옥수수는 수염이 말라간다. 농부가 첫 수확한 옥수수 세 개를 따다 준다. 껍질을 벗기고 굵은 소금만 넣어 삶았다. 쫄깃쫄깃 한 것이 맛있다. 거리에는 노지 옥수수가 나온다. 여름 한 철 길거리 장사를 하는 촌부들, 나도 한 때 그들 틈에 끼었었다. 현금 만지는 재미도 있었지만 온종일 손님 기다리며 천막 아래 죽치는 것도 마음 닦는 일이었다. 농사꾼 아낙으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아니었나 싶다. 천막 아래서 책을 읽었다. 글을 썼다. 


 농촌에는 묵정이가 된 논밭이 늘어난다. 기운이 조금만 남아도 농사를 짓는 촌로들이다. 묵정이로 놓아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어진 몸이라는 거다. 한 뼘의 땅이라도 놀리면 하늘이 노한다고 믿는 촌로지만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가까이 사는 자식들 오라 가라 하는 것도 잠깐이다. 지팡이를 짚거나 유모차에 의지해 집 밖에 나와 멍 때리기 하는 촌로 ‘내가 와 이리 됐시꼬.’ 한탄하는 모습도 흔하다. 누구나 늙고 병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더 외롭고 힘든 노인의 길이 아닐까. 


 아랫말 친구에게 밥 먹으러 가자고 청했다. 

 오늘은 내가 사 끼다. 남의 서방님 캉 같이 온나.

 전화는 왜 그리 안 받아? 답답하다.

 노는 날은 성당 가야지. 밭에 일해야지. 전화기 들고 노닥거릴 새가 없다.

 어쨌든 보자. 얼굴 잊겠다. 


 그렇게 만났다. 그 친구는 이웃에 살아도 얼굴 보기 힘들다. 요양보호사를 한다. 노는 날은 텃밭을 가꾼다. 여자 혼자 거두기엔 큰 삼백 평 밭이다. 온갖 푸성귀 심어놨지만 이젠 밭일은 지쳤단다. 묵정이로 둘 수도 없어 속이 탄단다. 부지런한 그녀도 일에 지칠 때가 됐다. 그녀는 한 달에 200만 원이 넘는 봉급쟁이다. 그 돈이면 저축하고도 살겠다고 했더니 모자란단다. 들어오기 바쁘게 나간단다. 애들이 돈돈 하면 쌈지 돈 털어주게 된단다. 손자손녀들 오면 용돈 줘야지. 빚내서 집 샀는데 대출금도 못 갚겠다고 우는 소릴 하면 돈주머니 풀 수밖에 없단다. 나는 애들이 수시로 과일이며 반찬거리 택배로 보내준다고 자랑했더니 한숨을 쉰다. 그것도 미혼일 때 이야기란다.


 시집 장가 가 봐라. 엄마 돈돈 한다. 

 그래도 손자손녀 거느린 자네가 부럽네. 우리 애들은 우리가 돈 없는 줄 아니까 돈 모아서 결혼한다네. 빚을 내도 결혼식 올려 주겠다고 해도 그 돈으로 맛있는 것 사 먹고 여행 다니라네. 여행도 힘이 있어야 하지. 이젠 둘이 다니는 것도 힘드니 늙는 게 서글프지.


 점심 먹고 둑길 드라이브를 했다. 강을 낀 강둑은 연분홍 바늘나비꽃이 곱게 피었다. 외래종 야생화가 시골 들녘에 자리 잡은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지금 자라는 어린이는 저 꽃을 토종 야생화라고 알지 않을까. 허기야 꽃은 보는 마음은 순수하다. 지천에 핀 개망초 꽃도 아름다우니. ‘참 곱다. 아, 생각났다. 지난여름에도 우리 여기 왔었지?’ 그녀는 새삼스럽게 고마워한다. 아흔이 넘은 시부모님을 4년 정도 도와주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시부모님 이야기를 한다. 우리 시어머님 생각이 자주 난단다.


 할매가 할배 보기 싫어서 캄캄한 새벽에 콩밭에 가서 앉아 풀을 빼다보면 날이 밝아 온다더라. 콩밭 매고 고추 따면서 눈물인지 땀인지 많이도 흘렸다더라. 우리 남편 일찍 죽은 거 너무 섭섭해 하지 말라던 말이 귀에 쟁쟁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로 만난 것도 인연이다. 부부가 되는 순간부터 희로애락의 고갯길을 넘나들 수밖에 없다.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고, 체념과 달관도 공존한다. 미운 정도 정이고, 고운 정도 정이다. 부부로 살다가 헤어져도 함께 살았던 날은 그대로 남아있다. 사람의 머릿속은 생각의 창고다. 그 창고 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끔은 잊기도 하고, 더 선명하게 기억도 하지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에 불과하다. 되돌릴 수 없기에 인생 백 년도 짧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그녀의 심성이 좋다. 


 저녁 어스름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와 즐긴 하루가 오롯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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