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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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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02. 2022

24. 봄 향기를 식탁에

봄 향기를 식탁에      


 

 참 오랜만에 못 둑을 걸었다. 보리도 풀어줬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 겁났지만 나잇살 배기 보리는 눈치가 백 단이다. ‘안 돼.’하면 내게 뛰어오르려다가 주춤한다. 목줄을 풀어주면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개의 습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손으로 제지하면 말을 잘 듣는다. ‘가자.’ 내 앞에서 뛰어 길을 건너고 못 둑으로 향한다. 개는 습성대로 코를 벌름거리며 들쥐를 찾는다. 보리도 오랜만에 찾은 자유다. 딸이 있을 때는 날마다 한 번씩 목줄을 매서 산책을 시켰었다. 자꾸만 동네 쪽으로 가려는 바람에 풀어줄 수는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보리는 내 말을 기차게 잘 듣는다. 젖떼기 한 강아지를 데려다 키우고 각인시킨 사람이 나라서 그럴까. 조건반사적이라던가. 한 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이라고 하던가. 내가 아프면서 보리의 밥과 똥 치우기는 농부 몫이었지만 목줄을 풀기만 하면 제멋대로 달아나버려 통제를 못한다고 한다. ‘내가 데리고 가면 말 잘 듣는데. 숲으로 뛰어갔다고 보리 하면 금세 내 앞에 와 서는데.’ 그래도 내 말을 안 믿는다. 오늘은 시범 삼아 목줄을 풀어 데리고 나갔다. 목줄을 매서 끌기에는 보리의 기운이 너무 세다. 걸음걸이가 부실한 나는 자칫하면 넘어지기 쉽다. 안전한 조치는 보리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거다. 


 보리가 숲을 뛰어다니며 배설을 하고 제 영역 표시를 할 때 나는 덤불 속에 들어가 쑥을 뜯었다. 예전부터 해쑥은 약이다. 마당가에서 냉이와 어린 쑥을 뜯어 쑥 냉잇국을 끓여 먹긴 했다. 보약을 마신다면서. 시장에 가 봤자 새로운 먹을거리도 없고 비싸기만 하다. 물가가 자꾸 치솟는다. 발품만 팔면 맛있는 봄 향을 마실 수 있는데도 그 발품 팔기가 힘들었다. 오늘은 걷는 것에 조금 자신이 붙어 시험 삼아 산책을 나선 것이다. 확실히 지난해보다 건강해진 것을 느끼겠다. 홑잎이 피면 홑잎나물 뜯으러 다녀도 되겠다. 머위도 나풀거리겠지만 골짝에 들어갈 자신은 아직 없다. 조심하지 않으면 한 순간 넘어져 병원신세 지기 딱 좋다. 


 문득 <살얼음을 걷는 소녀>란 소설이 생각난다. 제목이 맞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소설이다. 내용은 기억 안 난다. 그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고, 하필이면 엄마가 밥솥에 불 때라는 바람에 아궁이 앞에서 읽다가 집에 불 낼 뻔했다. 그때도 겨울이었나 보다. 갈비(솔잎마른 것)로 불을 땠었다. 아궁이에 갈비를 길게 대 놓고 책에 빠졌다가 불꽃이 나뭇단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일촉즉발이었다. 그때 동이에 물을 이고 부엌에 들어오던 엄마가 놀라서 동이의 물을 나뭇단에 부어 불을 껐다. 덕분에 엄마의 회초리를 피해 부엌 뒷문으로 달아났고, 엄마에게 빼앗긴 소설책은 아궁이에 들어갔던 것이다. 반쯤 타다 만 소설책을 꺼내 품에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쑥을 가득 뜯어 안고 집으로 오는 길, 보리가 없다. ‘보리!’ 부르자 어디선가 튀어나와 앞에 선다. ‘집에 가자.’ 보리는 통통한 엉덩이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앞장선다. 비탈진 삽짝을 오르면서도 연신 뒤돌아보며 내가 따라오는지 살핀다. 제 집 입구에 닿자 얌전하게 목줄 앞에 가서 선다. 목줄을 걸어달라는 뜻이다. ‘고맙다. 말 잘 들어서.’ 보리의 목줄을 매 놓고 대가리를 쓰다듬어주고 돌아선다. 마당에 들어서다 돌아보면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좀 더 놀고 싶어 하는 눈치다. 측은지심이 일지만 ‘담에 또 가자.’며 손을 흔든다. 보리는 느릿느릿 꼬리를 흔든다. 


 집 아래 아슴아슴한 자리에 큰 저수지가 있다. 딸은 보리를 데리고 그 못 둑까지 원정을 다녔다. 수달 가족이 살더란다. 날마다 수달 가족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다며 만지고 싶은데 금세 물속으로 들어 가버리는 바람에 눈요기만 했단다. 암수 두 녀석이 살더란다. 어디로 가나 숨어서 살폈더니 돌 틈에 구멍이 나 있고 거기를 들락날락하더란다. 수달이 아예 집을 짓고 산다는 뜻이다. 큰 물고기는 씨가 마르겠다. 몇 년 전 우리 집 작은 저수지에서 살던 녀석일까. 먹을 게 없어지자 큰 저수지로 터전을 옮긴 것일까. 보리가 발견했단다. 보리는 그 수달을 보러 가고 싶었을지 모른다.  


 마침 농부가 왔다. 내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점심 먹으며 ‘골짝에 머구가 솟았을 텐데.’ 지나가는 말을 했었다. 농부가 좋아하는 것은 어린 머위다. 나는 너풀거리는 잎사귀로 쌈 싸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도 최근 몇 년 전부터다. 쓴 머위는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나이 드니 입맛도 변하는 것 같다. 농부랑 같이 머위를 즐기다 보니 중독된 것일까. 발품만 팔면 식탁에 봄 향기를 잔뜩 올릴 수 있는 계절이 좋다. 촌부로 사는 즐거움 중 하나가 무공해 자연산 나물을 언제든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곧 홑잎과 고추나물 같은 산채도 먹을 수 있다. 자연의 일부로 산다는 것의 즐거움이다. 발품만 팔 수 있으면 맛깔스러운 밥상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그 발품 팔기가 어려워지는 몸이다.


 봄에 나는 나물은 뭐든지 보약이란다. 내 손으로 거둔 것들이라 한 맛 더 나지 싶다. 삽짝은 개나리로 노르스름하고, 숲은 진달래로 발그레한 봄, 찹쌀가루로 화전도 부치고 싶다. 아이들과 진달래 꽃잎 따서 화전 부쳤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야생화 뜯어서 겉절이도 할까. ‘에이, 관두자. 한꺼번에 다 하면 재미없지. 오늘 운동은 제대로 했으니까.’ 쑥을 다듬고 머위도 다듬었다. 머위는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고, 쑥은 씻어서 채반에 건졌다. 저녁 밥상에는 봄 향기가 진동하겠다. 쑥국과 머위 초무침을 할 생각에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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