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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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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04. 2022

25. 보리와 함께 못 둑길을

보리와 함께 못 둑길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들을 본다. 마당의 돌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이면 이슬 머금은 쑥과 달래가 연한 초록 잎사귀를 나풀거리며 눈 맞춤을 한다. 눈을 숲으로 옮기면 발그레한 진달래가 눈 맞춤을 한다. 내가 가진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시간이다. 가진 것이나 있나. 맨몸으로 왔다가 맨몸으로 가는 인생이다. 쑥을 뜯어 모은다. 손톱 밑이 새까맣게 변하도록 쑥을 뜯다 보면 내 등에 앉았던 햇살이 정수리에 앉는 것을 느낀다. 


 쑥 한 줌 담긴 소쿠리를 들고일어난다. 쑥을 더 뜯을까 말까. 망설이다 삽짝을 본다. 보리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보리의 목줄을 풀어주고 비탈길을 내려간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조차 무심해진 나날이 이어진다. 죽을 만큼 보고 싶다는 친구의 문자를 떠올린다. 보고 싶으면 봐야지. 마음 가는 대로 행해라. 인생은 길지 않다. 하고 싶은 것도 다 못 하고 저승길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후회를 해도 실수를 해도 남의 몫이 아니라 내 몫이다. 가지 않은 길을 그리워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작은 저수지의 물도 녹색을 띤다. 산그늘 내려앉은 자리가 눈부시다. 납작한 자갈 하나 주워 물수제비를 뜬다. 자갈은 두세 번 널뛰기를 하다가 가라앉고 그 자리에서 일어난 파문은 가장자리에 닿아 소멸된다. 사는 일이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죽을 것처럼 힘들다 느끼다가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움직인다. 눈에 보이는 일감으로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는다. 사랑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 아닐까.


 보리는 천방지축이다. 묵정이 논으로 뛰어간다. 통통한 궁둥이를 흔들고 꼬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발은 부지런히 덤불을 헤친다. 보리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거치적거릴 게 없다. 목줄을 매고 있을 때는 자유의지가 소멸된 박탈감에 얌전해지는 것은 아닐까. 휘파람 한 줄 날리면 금세 내 앞에 와 선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눈빛만 봐도 통하는 것이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속의 주인공처럼 외계인의 숙주로 사는 인간이라면 개와 소통이 가능할까. 


 못 둑을 지나 덤불 속을 살핀다. 내가 쑥을 뜯는 사이 보리는 사라진다. 숲이 조용해지면  보리를 부른다.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보리의 털에는 도깨비바늘이 잔뜩 묻어있다. 도깨비바늘은 내 옷에도 붙어있다. 보리의 몸에 붙은 도깨비바늘을 떼어주고 내 바짓가랑이에 붙은 것들도 떼어낸다. 흙과 만나면 그 씨앗은 발아를 하고 자리를 잡을 것이다. 씨앗 속에 잠자던 생명을 눈뜨게 하는 것이 봄의 섭리다.


 소쿠리에 쑥이 가득 찬다. 몸의 기운이 쭉 빠진다. ‘집에 가자.’ 내 한 마디에 보리는 앞장을 선다. 말귀 알아듣는 개와 산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피고 지는 꽃과 가고 오는 계절도 벅찬 것들이다. 사방에 연둣빛 잎눈이 튀어나온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띈 것은 모과나무 어린순과 찔레 순이다. 파릇파릇 하루가 다르게 빛나는 것들 너머 버드나무도 연노랑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이에도 계절은 변화를 거듭한다. 


 보리를 묶어 주고, 쑥을 가려놓고 찜질기를 편다. 어깻죽지가 많이 아프다. 남은 생은 아야, 아야,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약 기운에 팔팔하게 살아나는 것도 잠깐이다. 풀 죽었던 푸성귀를 물에 담그면 잠깐은 팔팔해진다. 노인이 되면 사람도 마찬가지다. 병원에 다닐 때는 살만하다가도 다시 풀이 죽는다. 풀이 죽었다 깨어났다 하다가 영영 눈 감는다.


 어제 만난 중년 여인의 하소연을 떠올린다. ‘우리 시매가 구십 다섯 살이지요. 요양원은 죽어도 안 가시겠답니다. 할 수 없어 저녁밥만 차려줄 아주머니를 구했어요. 한 시간에 만 삼천 원씩 주고. 요양보호사는 점심때 세 시간밖에 안 하니 할 수 없어요. 우리 시매가 고집 덩어리라 며느리는 사람 취급도 안 해요. 아들이 가면 반색을 하시면서 며느리는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아요. 미워서 나도 잘 안 갑니다. 노인네 뜻 다 받아주면 끝이 없어요. 부부 사이에 시매가 끼어 저러니 부부 사이도 나빠지데요.’ 그 아주머니나 나나 매한가지다. 


 햇살 환하던 마당이 다시 어둑해진다. 저녁부터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였다. 비가 오긴 올 듯하다. 힘든 사람들 더 힘들게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다. 아니 비만 흠뻑 적셔주고 물러가길 바라지만 그것 역시 내 의지와 상관없다. 자연이 하는 일을 인간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 태풍이 강타하면 맞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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