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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07. 2022

26. 조리돌림 하는 태풍

조리돌림 하는 태풍     


  거센 바람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태풍이 온다고 했다. 태풍 대비할 것도 없다. 창문이 덜컹거리고 우당탕 뭔가가 날아다닌다. 제멋대로 휘둘리는 나뭇가지가 내는 비명이 애처롭다. 봄을 키우는 진통일까.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나면 다시 고요가 온다. 산속 집을 찾아들 사람도 없다. 문득 바람이 무언가를 조리돌림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조리돌림이란 예전에 마을에서 못 된 짓을 한 사람에게 등에 북을 달아매고 죄상을 적어 붙인 다음, 농악을 앞세우고 마을을 몇 바퀴씩 돌게 하는 벌이었다. 멍석말이도 있다. 죄인을 멍석에 말아놓고 동네 사람들이 멍석에 물을 뿌려가며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벌이었다. 누가 때렸는지 모르게 해서 원수질 일도 없게 하는 평등한 법의 집행이 아니었나. 두 가지 형벌 모두 마을 공동체의 동질성을 보호하는 차원이었지 싶다. 태풍은 무엇을 두들겨 패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나라가 어지럽다. 아니, 지구 전체가 어지럽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나 전쟁을 겪는 나라나 죽어나가는 사람은 평범한 국민이다. 21세기에 전쟁을 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우리나라도 전쟁의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불안심리가 된다. 인간의 본능 중에 사악한 것이 있다면 권력을 쥐고 싶고, 권력을 쥐면 과시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닐까. 역사의 한 획을 긋고 히틀러 같은 전범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링컨 대통령, 케네디, 영국 마가렛 대처 수상,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찌민, 한국의 김구 선생 같은 이름으로 남을 수는 없는지.     


 숲을 흔들어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소설책을 읽는다. SF소설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다. 짧은 단편들이 재밌다. 작품을 뒷받침하는 후기가 더 재밌다. 참 막힘없이 글을 쓰는 작가다. 책에서 밝혔듯이 흑인 여성 SF소설가는 진짜 4명뿐일까. 빙긋 웃는다. 농부가 슬그머니 현관을 나선다. 태풍에 가랑잎이 거실로 날아온다. ‘일기예보 적중이네.’하면서 사랑채로 나간다. 나도 책을 덮고 인터넷을 켠다. 농부는 명상에 들고 나는 넷플릭스로 외국 드라마를 본다. <굿 위치>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단막극인데 한 회마다 주제가 다르다. 예지력을 가진 주인공 캐시와 딸 그레이스가 미들턴이라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매회 음미할 문장들이 있어 틈만 나면 연다.


 <굿 위치>의 배경이 된 미들턴은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작은 마을이다. 관광지이기도 하다. 캐시는 작은 골동품과 대체의학 약제나 차, 양초, 액세서리 등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그레이스 하우스, 조식 제공 민박집을 운영한다. 그녀는 그 마을을 찾아온 낯선 사람이든, 그 마을 토박이든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마을의 해결사다. 직접 행동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게 조언하고, 잘못을 깨우치게 하는 방법이 교묘하다. 심리상담사라고 할까. 진짜 마녀일까.


 매회 주제는 달라도 비슷한 스토리 구성이라 화끈한 재미는 덜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다스려주는 대화나 새겨주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그녀가 권하는 책들이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말 한마디의 힘을 느낀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도 그 마을에 일주일만 있으면 캐시에게 세뇌되어 따뜻한 심성이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깨닫고 바뀐다. 사람을 바꾸는 힘을 가진 여주인공을 통해 나를 바꾸고 싶은 것은 아닐까. 내 속에 든 차갑고 냉정한 무엇을 사랑과 따뜻함으로 바뀌게 할 수도 있겠다고. 책을 통해 얻는 깨달음과 또 다른 맛을 느낀다. 시즌 5회까지 있다. 시즌 4회에 접어드는데 조금 식상하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오랫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거친 바람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내일 아침이면 저 태풍도 잠잠해지겠지. 뒤척이다 잠이 들었나 보다. 새벽 어스름에 잠을 깼다. 창문을 열었다. 어둠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마당에 물웅덩이가 널찍하다. 내가 잠든 사이 폭우가 내렸구나. 거센 빗줄기 소리에도 깊은 잠을 잤구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훈풍이다. 기온이 가장 낮은 새벽시간인데 방안 공기보다 따뜻한 바람이라니. 경직되었던 관절을 풀어주려고 몸을 움직인다. 깨어라. 깨어나라. 조리돌림하는 태풍의 눈에 들었던 것일까.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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