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허전하다
박래여.
숲 속이 연둣빛 이불을 폈다. 나무둥치는 더 검어 보인다. 첫 뻐꾸기 울음소리도 들었다. 새들의 지저귐은 더 소란스럽다. 마당의 잔디도 파릇파릇하다. 찾을 때는 안 보이던 냉이 꽃이 무더기로 피고, 봄맞이꽃도 앙증스럽다. 식물은 날씨의 변화에 예민하다. 이삼일 만에 파릇해진 벚나무와 꽃잎이 떨어져 쌓인 도로가에 어린 까투리가 종종걸음 친다. 하루가 금세 가고 일주일이 금세 간다. ‘세월 참 빠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시간은 변함없이 정확한데 젊어서는 깨닫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도 나이 탓일까.
농부의 생일상을 가볍게 차렸다.
이젠 많이 먹지도 못하겠다. 금세 포만감이 들어. 조금씩 먹는 게 편해.
푸념을 했다. 시부모님 모시고 먹던 남편의 생일을 생각한다. 늘 간식거리가 옆에 있어야 했던 시아버님, 쇠고기며 조기, 전복, 사골 곰 등, 영양가 있는 음식을 식탁에 올려야 했고, 갖은 영양제도 갖추어 놓고 드셨던 시아버님, 매끼 잘 드셔도 툭하면 어지럽고 기운 없다고 하셨다. 드시는 게 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무엇으로 기운을 돋워드려야 할지. 밥때만 되면 고민됐었다. 그때는 몰랐다. 노인이 되면 영양분을 분해하는 효소도 적게 분비되고, 몸에 저장되기보다 배출이 더 쉽다는 것을.
문득 바다가 그립다. 푸른 숲을 보면 검푸른 바다가 떠오른다. 속을 알 수 없는 검푸른 바다가 그리워져 사진첩을 열었다. 지난해 봄에 다녀온 울릉도 바다와 유채꽃밭에서 찍은 사진을 바라봤다. 바다를 볼수록 더 바다가 그리워졌다. 산에 살면 바다가 그립고 바다에 살면 산이 그립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내 마음이 사람 마음 아닐까. 바다는 내게 그리움이다. 바다를 생각하면 마음부터 차분해진다.
엄마, 바다 보고 싶다며? 갑시다.
난 출근하니까 못 가네. 엄마아빠 바다구경하고 오세요.
딸은 출근을 하고 아들과 집을 나섰다. 오랫동안 바다가 그리웠다. 농부의 한쪽 눈이 시력을 잃어가고 농부의 귀가 보청기에 의존할 정도가 되면서 장거리 여행은 자제했다. 바다가 보고 싶다면 두말없이 나서줄 농부지만 장거리 여행의 피곤함을 아는지라 아들 오기만 기다렸다. 안심하고 운전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아들이다. 시아버님은 ‘참 운전 잘한다. 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모 편해서 좋다.’며 손자가 오면 바람 쐬러 가자거나 병원 가자고 불렀었다.
그렇게 삼천포 해안도로를 따라갔다. 바다 곁의 아늑한 찻집에 앉았다. 커피와 빵을 시켜놓고 바다를 봤다. 원 없이 보고 가야지. 바닷물이 쓱쓱 밀려난다. 썰물 때다. 대여섯 물은 되겠다. 물 빠지는 것을 지켜보면 신기하다. 바닷물이 철썩 파도를 치며 확 밀려왔다가 조용히 빠져나가는데 그때마다 물 빠진 자리가 넓어진다. 갑자기 은빛 한 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배를 뒤집으며 허리를 휘는 은빛 고기다. ‘무슨 고기지? 굵은데?’ 점프를 하는 굵은 고기는 생뚱맞고도 신선하다. 무리 짓지 않고 홀로 빛나는 별 같다.
남해 창선대교를 지나면 유채꽃 밭이 나온다. 몇 년 전까지 도로변이 온통 유채꽃 밭이었는데 관광단지 조성으로 바뀐 탓일까. 언덕 한쪽만 유채꽃이 곱다. 꽃 속에 길도 내놓고, 사진 찍을 포인터도 만들어 놨다. 제주 신혼 길에 만났던 유채 꽃이다. 꽃향기는 별론데 노란 꽃밭에 들어서면 그냥 편해진다. 사진 몇 장 찍었다. 벚꽃 철, 유채꽃 철이 되면 한 해도 빠짐없이 두 어른 모시고 다니던 길이었다. 내가 노인이 되니 차 타기도 되다. 다시 남해로 길을 잡았다. 창선대교를 지났다.
저기 바지락 칼국수 집에서 점심 먹자.
맛이 달라졌다고 했잖아.
그래도 가 보자. 옛 맛이 살아났을지.
남해 갈 때마다 들리는 바지락 칼국수 집이다. 늘 보던 늙수그레한 주인아저씨 대신 삼십 대 청년이 면을 삶고 있다. 창가에 앉았다. 칼국수와 해물파전을 시켰다. ‘이 집주인 바뀌었어요?’ 반찬을 들고 온 직원에게 물었다. ‘아드님이 물려받았어요. 저분입니다.’ 대물림하는 집, 참 오랜 인연이다. 내가 처녀 적에는 할머니가 주인이셨다. 마당가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쇠고기 육개장을 끓였고, 바지락 칼국수를 했었다. 남해에 가면 그 육개장이나 바지락 칼국수를 먹어야 속이 풀릴 정도로 정이 들었다.
엄마, 괜찮은데. 바지락이 많이 들어 그런가. 담백한 맛이 괜찮네.
농부와 나도 만족했다. 고맙기도 했다. 전통을 이어가는 바지락 칼국수 집이어서.
그렇게 송정 해수욕장을 지나 상주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전망 좋은 자리에 멈춰서 바다를 마음에 담았다. 오랫동안 꺼내놓고 보고 싶어서. 가는 곳마다 추억들이 많다. 남해바다는 구석구석 안 가본 자리가 없을 정도로 즐겨 찾았었다. 더 노인이 되면 바다구경도 쉽지 않겠지.
남해 마을 책방을 찾았다. 예전에 목욕탕이었다는 마을 책방은 골목 안에 있기엔 아쉬울 정도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북 콘서트도 한다는데. 책장사가 될지 모르겠지만 조용한 책방 지기가 지키고 있었다. 모 신문 기자를 했다는데 드센 느낌이 전혀 안 드는 시골처녀로 보여 신기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책,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은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과 클리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가 있었다. 샀다. 회원 가입을 하면 10% 할인이라는데. 그냥 샀다. 참 오랜만에 사 본 책이다. 보고 싶다는 책은 남매가 인터넷 주문을 해 주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봤었다. 책 쌓이는 것도 부담이 되는 나잇살을 산다는 것.
남해 전통시장에도 들렀다. 성게와 해삼, 조개를 사고 죽방림 멸치도 샀다. 육수용이 4만 원, 볶음 멸치가 6만 원이다. 너무 비싸다니까 주인은 멸치가 잡히지 않는다고 울상이다. 장사꾼도 이문이 남아야 먹고살지.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르지는 않을 것 같아 흔쾌하게 계산했다. 주인은 고맙다며 자연산 미역 한 봉지를 덤으로 준다. 돈 쓰는 날이지만 돈 쓰는 재미도 있었던 날이다.
저녁은 딸도 참석할 수 있는 동네 횟집에서 가자미회와 도다리 쑥국을 먹었다.
아들딸, 고맙다. 아빠 생일인데 내 생일 같네.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촛불을 켰다. 생일 축하곡에 이어 박수가 터졌다. 숲 속의 밤도 깊어갔다.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편안한 날, 가족이 모두 모인 집, 두 어른만 빠진 농부의 생일날 밤이 깊어간다. 두 어른 돌아가시고 ‘바빠 죽겠는데 생일은 무슨 인자 그런 거 안 챙겨도 된다.’ 던 농부지만 남매 덕에 행복한가 보다.
나는 주마등처럼 스치는 그리움 한 자락 어둠 속으로 밀어낸다.
이제 두 어른도 가셨고, 농사도 확 줄여 수월한 사월이지만 왠지 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