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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딸이 아닌 아내로

by 박래여

딸이 아닌 아내로

박래여


선물이 푸짐한 날이다. 먹을 게 차고 넘친다. 농협에서 생일선물 박스가 도착하고, 갈비세트며 과자류, 과일류 등, 딸이 시킨 선물박스도 도착하고, 가정학습을 맞아 바지락이며 소시지 등, 식자재 박스를 들고 아들도 왔다. ‘저녁에 엄마 좋아하는 바지락 파스타 해 주려고’ 말만 들어도 고맙다. 두 달 만에 온 아들이 부엌에 들어선다. ‘엄마가 해 줄게. 너는 책이나 봐라.’ 그랬지만 아들은 익숙하게 음식을 조리한다. 음식 만드는 것이 재미있단다. 평소에는 학생들과 지내고 학교 급식을 먹기 때문에 음식 만들기는 주말 취미생활이란다.


오랜만에 네 식구가 모여 밥상 앞에 앉았다. 바지락 술국에 훈제 돼지고기와 와인도 두 종류가 놓인다. 와인을 두 병째 따자 아들은 파스타를 만들어 식탁에 올린다. 나는 파스타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말랑하게 삶은 면도 따끈따끈한 국물도 입에 착착 붙는다. 면을 좋아하는 식성은 나이 들어도 변하지 않는다. 남매가 걱정한다. 내 뱃속이 과부하 걸리겠다고. ‘밥은 먹기 싫은데 면은 있는 것이 한정이다. 입에 댕기는 걸 어쩌겠냐? 먹고 죽은 귀신은 빛깔도 좋단다. 얼마나 오래 살겠다고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참아? 난 그러기 싫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 말이 남매에게 상처가 될까.


요즘 들어 나는 참 허랑한 나날을 살고 있다. 모두들 살고자 하는데 나는 왜 죽음에 집착할까. 해답을 얻을 수 없어 더 깊이 몰입하는 것은 아닐까.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길어서 그럴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29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영원을 사는데 일흔의 목전에 앉은 나는 명시 한 줄 쓰지 못하고 촌부로 살아서 그런가. 날마다 일기라는 이름으로 쓰는 일상의 나열도 글이 되는가. 사람으로 태어나 졸수를 산다 해도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는 벚꽃 같은 인생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고, 살아갈 것인가.


환갑을 넘어서면 삶에 바라는 것이 적어진다. 명작을 쓰고 싶다는 욕망도 내려놓게 되고, 이름을 남기겠다는 생각조차 부질없어지면서 내가 쓴 글을 돌아볼 때가 많다. 나 죽고 나면 쓰레기밖에 더 되겠나. 내 삶의 편린들을 알아줄 사람이 있기나 할까. 자식들은 기억하겠지만 자식들도 노인이 되면 부모를 그리워하는 일도 잠깐이다. 가고 오는 것에 연연할 나이도 지난 것 같을 때, 철 지난 옷을 꺼내보는 느낌이다. 살아있으니 살아가는 거다. 내가 나에게 세뇌를 시킬 때도 있다. 잘 살았니, 잘못 살았니, 따질 필요조차 부질없어질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래, 행복은 사소한 것에 있다. 남매랑 주고받는 대화, 부딪히는 와인 몇 잔, 바삭한 참 크래커 위에 올린 치즈와 방울토마토와 꿀, 그 맛에 취하는 것도 행복이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모여 이루는 것이 삶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알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지든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일주일 내내 잔치다. 농부의 일흔한 살 생일은 걸다. 아들은 직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날마다 특별 식을 만들어줄 것이다. ‘엄마, 내일은 소시지 구이 해 줄게.’ 아들의 말에 살짝 귀띔을 한다. ‘아빠 생일인데 아빠 좋아하는 거 해야지. 내일은 내가 갈비찜 해 줄게’ 두 어른이 생존할 때는 농부의 생일날이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농사일에 지쳐 허덕여도, 장을 봐다 생일상을 차렸다. 두 어른 모시고 먹는 아침 생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겉치레를 할 필요도 없어졌지만 대신 남매가 우리 부부의 생일을 챙겨준다. 내리사랑이란 뜻을 겨우 알 것 같다.


엄마, 갈비찜 하기 귀찮지 않아?

괜찮다. 갈비찜 먹고 싶은 걸 누나가 알았나 보다. 갈비를 시킨 걸 보니.


나는 갈비를 큰 들통에 담아 물에 담근다. 갈비찜도 핏물 제거와 잡내 제거, 기름 제거가 필수지만 대순가. 하루 고생하면 될걸. 사골 곰은 사흘 고생해야 구수하고 뽀얀 곰국을 얻게 되지만 갈비찜은 몇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나는 벌써 갈비찜에 들어갈 재료를 챙기고 있다. ‘너희들이 와야 이런 거 먹어 본다’는 농부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남편보다 자식이 우선인 걸. 어미 젖꼭지 빨며 자란 자식이니 모정이 아니 강할 수 있겠는가. 문득 엘리자베스 M. 토마스의 『세상의 모든 딸들』이 생각난다. 아이를 낳기 위해 홀로 숲으로 들어가던 주인공의 이름도 잊었지만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이를 잉태고 분만하는 과정에서 성숙하는 여자를 본다. 그 책에 푹 빠졌던 시절 나도 엄마가 될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은 세상의 모든 딸들 중 한 명으로 살다 늙어가는 나를 본다.

그러나 지금은 딸이 아닌 아내로 농부에게 묻는다.

날마다 생일상 받는 기분 어떻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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