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소설이다.
박래여
주말이다. 늦잠 자는 딸을 깨우지 않기로 했다.
김주혜의『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다가 허기가 진다. 1918년 일제강점기에도 떵떵거리며 사는 친일파들 이야기와 딸을 기방에 팔아야 할 만큼 입에 풀칠도 어려웠던 민중의 피폐한 삶이 떠올라서 그럴까. 지금은 21세기다. 모든 것이 풍족하다. ‘요새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있나. 동냥아치도 옛날 이약 이제.’ 하는 시대를 살지만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은 더 깊어지고 빈부격차는 더 심해진 사회라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불신의 시대, 사기꾼이 판치는 세상, 서로의 이득을 위해 거래는 성립될 수 있어도 믿음은 없다는 설이 정답 같을 때 있다. 소설은 21세기에 읽는 1918년도 배경이라 그런가.
나는 책을 탁 접고 부엌으로 향한다. 따끈따끈한 된밥을 주걱으로 한 덩이 푼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두밥이다. 손에 찬물을 묻혀 초밥처럼 타원형으로 자근자근 누른다. 손바닥에 온기가 스민다. 손바닥을 편다. 내 손가락 모양이 찍힌 밥 한 덩이가 나를 바라본다. 소중한 것을 떼듯이 귀퉁이를 조금 떼어 입에 넣는다. 입안에서 밥알이 돌돌 구르는 것 같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과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고두밥 한 덩이를 먹고도 허기가 달래 지지 않는다. 밥을 또 한 주걱 퍼서 뭉친다. 나는 마음의 허기가 질 때면 된밥을 하는 버릇이 있다. 아무것도 섞지 않은 하얀 이밥, 밥물을 적게 부어 꼬들꼬들한 밥, 경상도에서는 하얀 이밥을 맨제지라고도 쓰고 맨재지라도도 쓴다. 사투리는 말글을 글말로 바꾸기에 맨제지라고도 맨재지라도 쓰지 않나 싶다.
그 맨재지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오래전, 『맨제지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제목으로 쓴 수필이 생각났다. 수필집 『푸름살이』에 든 한 꼭지다. 찾아서 읽어봤다. 어려서 느꼈던 가난에 대한 허기였을까. 꽁보리밥을 먹은 기억도 없는데 내 마음 안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숨어 있다. 마음의 허기를 다른 말로 하면 속이 허하다. 속이 허할 때 나는 자꾸 입이 궁금하다. 입이 궁금하다는 것은 경상도 사투리로 입이 심심하다는 뜻이다. 남 보기에 행복한 사람인데도 정작 본인은 채워지지 않는 뭔가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사는 것처럼 내 마음의 허기는 물질이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다. 그 허기는 입맛으로 온다.
분명한 것은 김주혜의『작은 땅의 야수들』이 가져온 허기는 아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오히려 이민진의 『파친코』와 조선희의 『세 여자』를 다시 읽고 싶게 한다. 어쩌면 최근에 읽은 최은영의 『밝은 달』, 클리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맡겨진 소녀』에 대한 여운이 길어서일까. 나도 작가지만 작가반열에 들지도 못한 열등감일까. 시샘과 질투심일까. 그 모든 감정이 어우러진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허기다.
날씨는 나흘째 우거지상이다. 날씨와 내 허기가 닮았다.
창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를 하는데 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슬퍼 보여. 날씨 탓인가?
일어났어? 입이 고프네.
밥 먹었어?
고두밥 주물러 먹었는데 허기가 지네.
아빠가 보고 싶어서?
일 없네요. 밥 먹고 고추모종 사러 가자.
그렇게 딸과 읍내 농협 육모 장에 갔다. 읍내는 축제 기간에다 일요일이라 복작복작하다. 오가는 차량도 어찌나 많은지. 읍내 외각으로 빙빙 둘러 농협 모종 파는 장소에 갔다. 고추와 매운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등등, 텃밭에 심을 모종을 샀다. 모종을 산 김에 이식도 해 치웠다. 모종은 야무진 딸이 심고 나는 설렁설렁 뒤처리만 했다.
야들아, 잘 살아라. 잘 살거래이.
덕담을 거름으로 뿌렸다. 소설 책 읽는 거나 텃밭에 고추모종 이식하는 거나 글로 쓰면 소설이 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소설이나 매일반이다. 둘러치나 메치나. 글로 표현하지 못한 일상이라 다를 뿐이지. 삶이란 장편소설이다. 주인공이 죽어야 끝이 나는. 우리 모두 인생이란 소설을 쓰면서 살아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