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중요해
아침마다 밥상을 차리는 딸이 묻는다.
엄마는 내가 있으니 좋아?
좋지. 지금은 좋지만 우리가 더 노인이 되면 네가 힘들 것 같아 싫기도 해
엄마, 다가오지 않은 날은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이 중요해.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다. 이슬이 깨면 덥겠다. 농부는 전기 자전거를 타고 삽짝을 나간다. 두불 감이 많이 왔단다. 감꽃이 핀다. 첫물 솎아내기 하고 첫 방제를 끝냈지만 두불 세불 감꽃을 솎아주는 일이 남았다. 늦게 달린 감꽃은 제 몫을 못한다. 솎아내기를 제대로 못하면 굵고 좋은 단감을 기대하기 어렵다. 감나무 한 가지에 열매 한두 개만 키워야 실한 단감을 얻을 수 있다. 단감농가는 하루도 쉴 틈이 없다. 풀도 무릎까지 자랐다. 단감 솎아내기가 끝나면 풀치기 작업도 해야 한다. 적기에 해충방제도 필수다
농부를 배웅하고 텃밭의 열무를 몽땅 뽑았다. 한 두둑에 반은 열무, 반은 상추를 심었더니 밥상의 효자노릇을 한다. 상추와 들깨는 여전히 솎아먹기를 하는데 남은 열무는 뿌리가 굵어지고 동이 오를 준비를 한다. ‘열무 씨 많이 있다. 저거 빼고 다시 뿌리지.’ 며칠 전부터 농부가 안달을 한다. ‘내가 알아서 해요. 가만있으소.’ 며칠이나 견딜까. 농부의 눈엣가시가 된 열무는 지워야 할 품목이다. 덕분에 이슬도 깨기 전에 일감을 만들었다. 물김치 겸해서 먹을 수 있게 되직하고 섬섬한 무김치를 담가야겠다. ‘엄마, 또 사부작사부작 일 꺼리 만드네. 무리는 하지 마이소.’ 딸도 손을 흔들며 삽짝을 나간다.
나는 수돗가에 앉아 열무를 다듬는다. 새들이 기웃거리며 조잘대고, 가까운 곳에서 뻐꾸기가 운다. 예전에는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리면 //뻐꾹 뻐국 봄이 가네. 뻐꾸기 소리 잘 가란 인사. 복사꽃이 떨어지네. 뻐국 뻐국 여름 오네. 뻐꾸기 소리 첫여름 인사, 잎이 새로 돋아나네.// 뻐꾸기 동요를 흥얼거렸던 내가 뻐꾸기 우는 소리가 달갑지 않다. 탁란의 현장을 지켜본 적이 있다. ‘저 녀석이 제 새끼 데리러 왔구나. 또 창고 구석에 딱새가 품어 키웠나보네.’ 얄밉다. 제 새끼가 희생양이 된 줄도 모르고 업둥이 뻐꾸기 새끼를 지극정성으로 키우는 딱새 부부를 떠올린다.
어쩌면 뻐꾸기 잘못이 아닐지 모른다. 뻐꾸기의 생존법이 탁란이라면 자연의 순리다. 뻐꾸기가 탁란 하는 것도 종족 번식의 의무이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딱새는 어떤가. 뻐꾸기 새낀 줄 알고 키울까. 딱새 부부가 파란 벌레를 물고 번갈아가며 둥지를 드나드는 것을 지켜봤었다. 애처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는 사람도 있다.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입양해 친자식처럼 키우는 부모도 있다. 나은 정, 기른 정에 대해 어떤 정이 더 깊은지, 얕은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자식입장이든 부모 입장이든.
열무를 씻어 소금을 쳐 놓고 양념을 준비한다. 김치 한 통 담그고 나니 오전이 훌쩍 간다. ‘아이고 되라.’ 거실에 큰대자로 누웠다가 벌떡 일어난다. 햇살도 좋고 바람도 선들거리는 날은 이불 널기 딱 좋다. 이불까지 널어놓고 황차 항아리를 열었다. 차 냄새가 향긋하다. 발효 중인 황차를 뒤적거려 놓고서야 겨우 오전 일과가 끝난다. 탁자에 놓인 몇 권의 책을 뒤적인다. 문인들이 보내준 시집과 수필집, 가끔 소설집도 온다. 보내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완독을 하지만 소감 한 줄 보내기는 쉽지 않다.
전생에 지은 업이 많아서일까. 늘 몸이 고단하다. 나는 어떤 전생을 겪었을까. 기억할 수 없는 윤회의 고리를 생각한다. 어쩌면 전생 역시 촌부로 살아오지 않았을까. 무식해서 용감한 적도 있지 않았을까. 사랑도 받고 미워도 하면서 지금과 다른 삶을 살다 갔을지 모른다. 일상은 평온한데 몸은 천근이다. 몸이라도 아파야 내 몫을 하는 것일까. 몸이 아프면 엄마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엄마도 노인이 되면서 몸이 아파 죽겠다고 했었다. 지팡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때는 자식들 기다리는 낙으로 살았을 것이다. 어떻게 견뎠을까.
아흔에 수필집을 내신 배대균 선생님의 책을 편다. 『never say never』 불가능은 없다. 안 된다고 말하지 마라. 영어번역도 실려 있는 수필집이다. 서정적이다. 감성이 살아있는 수필 한 꼭지를 읽는다. 노인의 길은 미래보다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이 강하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을 반추하는 일이 잦다. 노 작가가 숲길을 산책하거나 진료실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하얀 가운을 걸친 노작가의 모습이 곱게 그려진다.
우리 모두 곱고 우아하게 늙고 싶어 한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원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원대로 되기 또한 어렵다. 생의 마지막이 힘들지 모르지만 노작가의 말처럼 다가오기도 전에 안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오는 것은 오는 대로, 가는 것은 가는대로 무던한 노후도 괜찮다.
숲이 깨어난다. 햇살이 상수리 잎에 앉는다. 상수리 잎에 윤기가 흐른다. 뻐꾸기가 운다. 남의 둥지에서 잘 자란 자식을 꺼내기 위해 우는 소리라 저리도 은근하고 구슬플까. 일상은 말없이 진행 중이다.
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다가오지 않은 날은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이 중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