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만 쏙 뽑고 싶은데.
창작 지원금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복잡하다. 농부와 딸은 당신 뜻대로 하란다. 두 아이 공부할 때는 돈 한 푼이 아쉬웠다. 원고료가 효자노릇 했다. 그때는 내 책을 낸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에 빚 청산도 해야 했고, 먹고살아야 했다. 그때는 창작 지원금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해마다 문예 진흥기금 선정이 있었지만 번번이 시기를 놓쳤고, 몇 번 신청을 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내 실력이 안 돼서 그래. 포기하자.’ 포기해 버렸지만 수필이든, 소설이든, 시든, 글은 꾸준히 쓴다. 내게 글쓰기는 삶의 원동력이다.
그동안 나잇살만 늘었다. 농사짓기도 문학 활동도 반타작을 했다. 살림 살고 컴퓨터로 세상 보기하고 문학 동인지나 문학잡지에 작품 발표만 하며 지냈다. 3년 전이었다. 부산에서 서예가로 활동하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언니, 창작지원금 신청 해 봤어?’ ‘아니, 예전에 문화예술위원회에서 하는 창작기금에 몇 번 신청했다 고배 마시고는 포기한 지 오래야.’ ‘밑져야 본전이지. 해 봐.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에 들어가 봐.’ 그렇게 해서 서류를 보냈고 선정 됐다. 기분이 묘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문인은 그 창작기금을 받아 시집이든 수필집이든 소설집이든 자비 안 들이고 책을 낸다고 했다.
그동안 소설책 한 권 엮고 싶었지만 자비출판은 엄두도 못 냈었다. ‘엄마, 그 돈으로 소설책 묶어 봐. 소설책 내고 싶다고 했잖아.’ 남매가 지지해 줬다. 『풀등에 걸린 염주』는 그렇게 세상에 나갔다. 발표한 작품 중에 몇 편만 뽑아 실었기에 아쉬움이 남지만 내 이름으로 낸 소설책 한 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출판에 대해서는 지금도 백지상태다. 출판사를 고르는 것도 인정이 앞섰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00 출판사에 의뢰를 했었다. 세상에 나온 내 소설책은 빛도 보지 못했지만 소득은 있었다.
인터넷 글밭에서 애독자가 된 독자도 있고 문학 동아리 지인도 있지만 꼭 보내야 할 작가나 독자에게만 책을 보냈다. 어떤 독자는 구역 내 도서관에 내 책을 신청했단다. 가장 고마운 독자는 20여 년 내 글의 펜이었다는 분이다. 고등학교 교사라면서 권장도서로 몇 권을 주문해 학교 도서관에 배치했다며 사진을 보내줬다. 소설책을 출판했지만 책을 난발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 『푸름살이』 수필집을 냈을 때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보냈었다. 내 서재에 달랑 한 권만 남기고 몽땅 나누어줬었다. 나중에 책도 공해구나 싶어서 후회했다. 또한 『푸름살이』 한 권 보내줄 수 없느냐는 독자의 전화에 난감했었다. 이미 품절된 책인 데다 내 서재에도 한 권만 있었다. 소설책은 지금도 여분이 남아있다.
얼마 전 책을 좋아한다는 분을 만났다. ‘책 한 권 드릴까요?’ 물었다. 나이 들면서 책 읽기도 힘들다고 했다. ‘제 이름으로 낸 소설집인데.’ 말끝을 흐리자 ‘작가세요? 세상에 이런 일이.’ 반색을 했다. 『풀등에 걸린 염주』에 서명을 해서 드렸다. 내 책을 받아 뒤적거리더니 ‘이것 봐요. 제 팔에 소름이 돋아요. 책은 사야 하는데. 그냥 받아 어떡해요.’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예전에 어떤 처녀가 ‘어머, 어머, 이모, 소설가였어요? 우리 고장에도 소설가가 있었네. 너무 신기해요. 이모가 작가라니.’하면서 사진을 찍어댔고 기염을 토했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풀등에 걸린 염주』라도 한 권 드릴 수 있어 행복했다. 아껴가며 나누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3년 만에 다시 예술인 창작지원금에 선정됐다. 부산 서예가 후배가 알맞게 알려주는 바람에 시기를 놓치지 않았고 서류작성은 딸이 도와줬다. 이번에는 시집 한 권 엮을 참이다. 오랫동안 쓴 시를 꺼내봤다. 참 열심히도 썼다. 발표작도 있고, 공모전이나 백일장에서 상 탄 것도 있다. 시집 서너 권을 묶어도 될 분량이다. 진수만 빼내고 싶지만 내가 쓴 시라서 그런지 어떤 시를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30대, 40대, 50대, 60대로 분류하는 중이다. 초장기 시는 동화처럼 맑은 느낌이 든다. 열악한 농촌 삶을 반추할 수 있었지만 소녀 적 감성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래서 읍내 지인들 만나면 시인이라고 부르는구나.’ 지역문학회에서 활동할 때는 꾸준히 동인지에 시와 소설을 실었다. 축제 기간에는 동인끼리 시화를 만들어 전시했었다. 욕심 같아서는 내 시의 진수만 뽑아 시집 한 권을 엮고 싶은데.
마당
쪽마루에 앉아 마당을 본다.
흐린 날이면 더 짙푸른 마당이다.
새들이 소란스럽다.
각자 가진 목소리가 어우러진 화음
조화롭다.
바람 한 점 없는 마당에
이슬인지 빗물인지
풀잎에 맺혀 반짝인다.
입만 동동 떠다니는 네모상자
누가 국민을 위하는 후본 가
뿜어져 나오는 열기 뜨겁다
붉은 당이든 푸른 당이든
인신공격성 발언은 안 했으면 좋겠다.
성숙한 인품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다.
마당처럼 닮은 꼴 없어도
나무와 풀과 꽃과 새가 제 빛깔대로
어우렁더우렁
평화롭게 살아가듯
사람도 마당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