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조를 펐다.
뻥 뚫렸다. 후련하다. 드디어 풀어졌다. 주거용 정화조 청소를 끝냈다.
며칠 째 신경을 곤두세웠다. 위생사에 전화할 때마다 며칠 기다려야 한다며 핑계거리를 댔다. 오물 처리하는 차가 고장 나서 공장에 가 있다했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집이 많다면서 날짜를 자꾸 늦췄다. 어떻게 해야 하나. 화를 내면 손해 본다. ‘정화조가 넘칠 것 같아요. 하루라도 빨리 좀 오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위생사도 있는 줄 알지만 거기가 우리 집 단골이잖아요. 자꾸 전화 드려서 미안해요. 사장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약속을 받아냈다.
정화조를 펄 때마다 떠올리는 이야기가 있다. 농부는 창피하다고 그 이야기를 못하게 한다. 나는 ‘뭐 어때.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그 사랑이 그립네. 어떤 남자가 그렇게 열정적이었어? 그런 남자 다시없겠지? 만나고 싶은데.’ 살살 약도 올린다.
결혼 전이었다. 시댁에 인사차 들리니 동네 사람들 호기심이 과했다. 시댁 돌담을 기웃거렸고, 골목에서 만나면 이유 없이 실실 웃었다. 등 뒤로 이런 말도 들렸다. ‘새파란 얼라네. 나가(나이가) 솔찮다더니. 저래 논께 00이가 폭 빠진 기라. 저런 처니가 청와대 가기보다 무서븐 그 집에서 전디것나? 자네 그 이약 아나?’ 어떤 소문이 파다했지만 정작 등잔 밑이 어두웠다.
결혼하고 몇 개월을 주말 부부로 살다가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재래식 시댁으로 들어온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친척 형님이 ‘설인가 추석인가 모르것지만 손님맞이를 해야 할 때라. 변소 통이 꽉 찬기라. 데름이 그날 똥을 펐다네. 똥 퍼다가 자네 전화를 받았다네. 데름이 그 질로 똥장군이랑 똥바가지를 던지삐고 자네 만내로 가삔기라. 똥을 퍼다 말고 데름이 사라졌으니 아재 성질에 난리가 났제. 뒷간을 사용할 수 없어서 낭패를 당한기라. 이놈의 자슥이 정신을 오데 빼묵고 사노? 함서 괌을 질렀다 안 카나.’ 그 소문 덕에 한동안 사랑꾼 농부 이야기가 가십거리로 날아다녔다.
시골 마을은 지금도 친인척 공동체다. 타성바지는 별로 없다. 성씨가 달라도 족보를 따져보면 먼 족이기 일쑤다.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로 인한 핏줄이기 십상이다. 그래서일까. 아지매, 아재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고 정겹다. 지금도 그렇다. 지금 시골 노인들은 대부분 재래식 집을 개조해 정화조가 있는 집에 살지만 귀한 거름을 내버린다고 아까워한다.
시골집에서 헛간은 필수다. 옛날부터 헛간은 거름을 만들고 저장하는 장소였고 농기계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헛간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뒷간이 있기 마련이다. 구석에는 오줌통과 똥 장군이 비치되어 있다. 농부는 일을 삼고 풀을 베어다 썰어 재우고 그 위에 아궁이의 재를 쳐다 붓고, 오줌을 뿌려 발효시켰다. 잘 삭은 거름은 토양을 살찌우기에 거름을 많이 내야 농사가 잘 된다고 했다. 비료가 보급되면서 가정집마다 거름을 만들던 풍경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거름공장에서 나온 거름을 사서 쓴다. 시골집도 개조됐다. 양변기와 싱크대가 설치되면서 재래식 뒷간 똥 퍼는 풍경도 사라졌다. 똥 장군과 요강이 골동품 가게에 놓이고 시집 올 때 친정엄마가 장만해주는 요강도 장식품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정화조를 펐다. 우리 고장에는 관공서에서 인정받은 위생사가 두 곳이다. 다른 곳을 부를까 했지만 안 불렀다. 내 성격 탓이다. 한 업체를 알게 되면 조금 섭섭하게 해도 그 업체만 고집하게 된다. 업체만이 아니다. 물건도 사람도 그렇다. 쉽게 곁을 주거나 선택도 못하지만 쉽게 마음을 바꾸지도 못한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참아버리는 성격이다. 곱씹고 곱씹다가 이건 아니다 싶으면 내가 손해를 봐도 과감하게 잘라버린다. 농부는 그런 나를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변화를 싫어해? 바꿔봐야 좋은지 나쁜지 알지.’ 이해불가란다.
마음에 안 든다며? 다른 업체를 불러.
관두자. 온다잖아.
30여 년 전부터 그 업체를 불러 정화조를 펐잖아. 우리 집도 잘 알고.
그때 젊은 사장님은 농부의 선배였다. 사장과 일꾼이 같이 다녔었다. 오랜만에 봤을 때 사장은 상노인으로 변했다. 무슨 병을 앓는다고 했다. 이번에는 일꾼만 오고 사장은 안 왔다. 노인이라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돌아가시지는 않았구나. 안심했다.
이웃 간에도 며칠 안 보이면 걱정이 된다. ‘돌아가셨나? 요양원 가셨나? 병원에 입원하셨나?’ 주변에 탐문을 한다. 40여 년을 한 자리에 붙박이로 살아왔기에 삼이웃 동네 어르신은 거의 안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보면 ‘아는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 택호가 어떻게 되더라.’ 머릿속을 굴릴 정도지만 ‘오랜만이네요. 건강하시죠?’상냥하게 인사를 한다.
정화조를 퍼주러 온 아저씨에게도 ‘건강 잘 챙기세요. 힘든 일 하시려면 우선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 이건 한 잔 드시고 하세요.’ 내가 만든 효소를 물에 타서 권한다. 돈 보시는 못해도 말보시는 하며 살아야지. 그것도 오가는 정인데.
똥 퍼다 팽개치고 여자 만나러 왔던 남자랑 티격태격 감정노동하면서도 사십 년을 산다. 여태 사는 걸 보면 나는 아무래도 변화를 엄청 싫어하는 성격이 맞는 것 같다. 여자는 카멜레온이 되어야 사랑받는다는데 나이 들수록 고집스럽기만 하니 사랑 받긴 글렀다. 사랑은 진작 포기하고 살아 그런지 편하다. 뭐 어때, 감정노동 안하고 살면 장땡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