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창 들으러 갔다가
딸이 없는 자리가 넓다. 중늙은이 둘만 남아 각자 자리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농사꾼인 농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농부를 따라다니며 농사일을 할 때는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편했는데. 만성 질환 덕에 뒤늦게 들일에서 벗어난 나는 집안에서 뱅뱅이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어도 몸은 집안이다. 농부가 감산으로 출근을 하면 나도 바빠진다. 빨래를 해 널고 책 몇 줄 읽다가 마당을 돈다. 아직 부드러운 녹차를 한 소쿠리 땄다. 그늘에 널었다.
며칠 전 마당을 돌며 찻잎을 땄었다. 찻잎을 덖고 비비는 과정을 생략하고 시든 찻잎을 뜨거운 불에서 살청만 해서 그늘에 널었다. 바삭하게 마른 차를 주전자에 담고 생수를 부어놨었다. 시간을 두고 우린 찻물은 의외로 맛이 괜찮다. 연둣빛으로 우러난 찻물이 시원하다. 조금 더 만들기로 했다. 지난 오월, 딸 덕에 황차와 녹차를 제법 많이 만들었지만 내 먹을 차가 모자랄 것 같았다. 간단하고 단순한 백차를 만들기로 했다. 물처럼 마시는 차다. 찻잎을 따서 그늘에 널었다가 시든 찻잎을 한 번만 살청 해서 말리면 된다. 찻잎 향은 어째 이리 풋풋하고 상큼한지. 머릿속이 맑아진다.
오후에 대금연습을 하던 농부가 갑자기 시조창을 들으러 가잔다. 시조창 행사장은 우리 집에서 사십여 분의 거리다. 내 무딘 귀가 열릴까. 우리의 전통 가락은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폐부를 찌른다. 요란하지 않고 은근하다. 우리나라 고유의 시조창은 선비문화의 산물이다. 미국 흑인 노예의 삶과 애환이 깃든 흑인영가와 완전히 다른 가락이지만 끌리는 가락이다. 나도 한국인이라 그런가. 우리 전통 가락은 요란하지 않지만 은근한 여운이 가슴에 닿는다.
행사장을 찾아갔다. 주차장에서 행사장으로 가는 길은 잘 조성된 공원 숲길이 었다. 시원한 강바람과 은파가 일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걷기 명상을 하듯이 걸었다. 나랑 보조를 맞추기엔 농부의 다리가 튼튼하다. 행사장까지 에돌아가는 길은 꽤 멀었다. ‘숲길이 참 좋네. 빠른 길도 있을 텐데. 일부러 이 공원의 숲길을 걸어오라고 배려한 것 같아요. 당신 먼저 가세요. 나는 천천히 걸어가 볼게.’ 바람을 따라 아련한 피리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강바람에 은빛으로 출렁이는 강물에 매혹당했다. 은은한 라벤더 향도 실려 왔다.
행사장의 압권은 세 그루 거대한 소나무였다. 목이 아프도록 소나무 우듬지를 올려다봤다. 무대에는 중늙은이 연주자 세 사람이 연주를 하고 있었고 마당에는 오붓하게 모인 사람들이 시조창을 경청하고 있었다. 올해 8년째 문화예술제를 개최했다는데. 관람객은 의자에 앉거나 평상에 앉거나 돌 위에 앉거나 자유로웠다. 공연장 옆의 넓은 밭에는 보랏빛 라벤더 꽃이 피어 있었다. 아담하던 옛 고가의 모습만 조금 살려놓은 집, 개인 사업장으로 개발 중인 집이었다. 그 집을 둘러보는데 왜 자꾸 <개발도상국>이란 단어가 떠오를까.
그렇게 시조창의 가락을 들으며 라벤더 꽃향기를 뒤로하고 지름길을 찾아 주차장까지 걸었다. 짧은 여행인데도 피곤하다. 멋도 모르고 효도한답시고 툭하면 두 어른 모시고 여행 나섰던 기억이 떠올라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유모차 밀고 따라다니던 어머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오호 통제라. 나도 중년을 넘어서면서 무릎과 허리가 아팠지만 그때는 젊었다. 내가 노인이 되어보니 알게 됐다. 허리 시술을 두 번이나 한 시어머님은 오래 차 타는 것도 힘에 부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어머님도 나처럼 ‘에효, 귀찮은 거, 그냥 집에 조용히 있는 게 낫지.’ 하셨을까.
농부는 ‘00사에 들렀다 갈래? 저녁은 우짜 끼고?’ 물었다. ‘그냥 집에 갑시다. 저녁은 김밥으로 때우고.’ 농부에게 미안했지만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툭하면 짧고 긴 여행을 자주 했었던 우리 부부다. 문화재니, 예술제니, 무슨, 무슨 축제니, 사방천지 잔치판이 벌어지면 일하다가도 탁 접고 다녀왔었다.
그러나 잔치판을 기웃거리는 것도 한 때였다. 국내여행, 국외 여행 역시 마찬가지다. 몸이 고단하면 아무리 생소하고 아름다운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노인이 되어하는 여행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나 저기 다녀왔어.’ 사진 걸어놓고 광고하는 것은 다녀왔다는 것에 내가 만족하기 위함이 아닐까. 호기심 많고 다리 힘이 아직 남은 농부 정도면 얻는 것이 많겠지만 나는 그냥 조용히 숲에 앉아 사물의 흐름을 관조하는 것이 좋다. 그래도 시조창 듣는 자리에 딸이 동행했다면 덜 피곤했을까.
집에 오자마자 뻗었다. 거실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니 농부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잠이 들었었네.
당신도 라면 한 젓가락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