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와 반추하다
박래여
지역에 따라 소나기가 온다는 날,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끈따끈했다. 바짝 말린 고추는 거두어들이고 덜 말린 고추는 텃밭 가에 세운 작은 비닐하우스에 널었다. 검은 그물망을 깔고 그 위에 고추를 널고 고추를 덮었던 그물망을 걷었다. 반쯤 마른 고추는 햇볕을 바로 받아도 희나리 질 일은 없다. 작은 비닐하우스는 금세 후끈 달아오른다. 소나기 예보가 있지만 비닐하우스 안이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농부는 볼일이 있다며 집을 비웠다.
오후가 되니 하늘이 심상찮다. 북쪽하늘부터 검은 구름이 둘둘 하늘을 덮는다. ‘지리산 쪽에 폭우가 쏟아지나 봐. 우리 지역은 괜찮을까.’ 혼잣말을 했다. 비닐하우스 안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가 자꾸 눈에 밟힌다. ‘괜찮겠지. 바람만 안 불면 괜찮아.’ 소나기라니까 잠깐 지나갈 수도 있다. 바람만 안 불면 작은 비닐하우스가 온전할 것이다. 다시 비닐하우스를 점검한다. 집게로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비닐만 벗겨지지 않으면 비닐하우스 안의 고추는 염려할 필요 없겠다. 일기예보가 맞은 적도 별로 없다. 안심했다.
전상국 작가의 단편집 『온 생애의 한 순간』에 푹 빠졌는데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진다. 금세 후드득 와그르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을 봤다. 굵은 빗줄기에 나무들이 휘둘리고 있다. 빗줄기는 거센 바람을 타고 창문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금세 쪽마루도 흥건히 젖는다. 바람이 굵은 은행나무를 제멋대로 흔든다. 순식간에 마당이 초토화 된다. 텃밭 가에 세운 작은 비닐하우스를 봤다. 집게로 꼭꼭 집어 뒀는데 비닐이 벗겨져 펄럭거린다. ‘고치, 저걸 우짜노.’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창고에서 소쿠리부터 챙겼다.
속수무책이다. 비에 젖은 고추는 얌전하게 누웠다. ‘아이고 무시라. 반타작 한 것인데 비를 맞혔으니 우짜노.’ 손을 쓰기엔 이미 늦었지만 고추를 거두어 창고에 들이고 펄럭거리는 비닐을 걷어 큰 돌로 눌렀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빗물인지 땀인지. 닦을 생각도 못하고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엉터리 일기예보가 맞을 때도 있구먼.’ 미리 비설거지를 하고 비닐하우스 단속도 했지만 물 폭탄에 거친 바람까지 예상 못했다. 비는 거침없이 쏟아졌다. 이럴 때면, 자연의 힘이 경이롭다.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느낀다.
저녁 무렵, 집에 온 농부는 비닐하우스가 날아간 것을 봤다.
고추가 다 젖었지?
방법이 없더라. 물기 마르면 저장고에 넣어야지.
건조기에 말리자.
건조기 돌리기엔 양이 적잖아. 전기세가 더 나올 거다.
물러지거나 곰팡이가 필 수도 있잖아.
하루 저녁은 괜찮아. 내일 햇볕 난다잖아.
나는 수건을 챙겨 창고에 갔다. 젖은 고추를 닦아 저장고에 넣었다. 고추를 갈무리해 놓고 저장고를 나오며 삼십여 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는 너덧 마지기 논에 마늘농사를, 500평 밭에 고추농사를 지었다. 새벽부터 시어머님을 따라 붉은 고추를 따러 다녔다. 비료포대 몇 개에 가득 찬 고추를 리어카에 싣고 나는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어머님은 리어카를 뒤에서 밀었다. 그렇게 거둔 붉은 고추를 헛간에 그물망을 깔고 널어놓고 아침을 챙겼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던 시절이었다.
한여름 햇볕이 좋을 때는 태양초 만들기도 어렵지 않았다. 헛간에서 이삼일 시들어진 고추를 시멘트 포장된 마당에 검은 그물망을 펴고 널었다. 그 위에 검은 그물망을 한 겹 더 씌워둔다. 하루에 한두 번씩 뒤적거려 다시 널기를 반복하다 삼사일 후에 씌웠던 그물망을 벗겼다. 일주일이나 열흘이면 건고추가 되어 포대에 담겼다. 장마철이 문제였다. 몇 날 며칠 햇볕이 안 나면 건조기를 찾아야 했다.
그때 가정집에는 저장고도 건조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동네 공동 작업장에 건조기 한 대가 있을 뿐이었다. 새벽 댓바람에 작업장에 도착해도 이장이 매겨주는 번호표를 받고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고추 한 판 말리는데 수수료 천 원을 냈다. 나는 수수료를 내도 수월해서 건조기에 말리자고 했지만 시어머님은 ‘기계 불에 말린 고치가리는 맛이 없다. 햇빛이 이래 좋은데 만다고 헛돈을 써’하셨다. 그때 천 원이면 지금 만 원보다 가치 있었다.
여름 내내 그렇게 고생하며 갈무리한 고추는 도시 사는 자식들과 친인척에게 아낌없이 나누었다. 건고추만인가. 쌀, 마늘, 양파, 참깨, 들깨, 팥, 콩, 간장, 된장, 무와 배추 등등. 나눔은 가난한 시절의 인정이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다. 아직도 농촌은 이웃사촌의 정이 살아있다. 나 역시 어떤 손님이든 집에 왔다 가면 빈손으로 보내기가 어렵다. 무엇이든 챙겨줘야 마음이 편하다. 자급자족할 정도로 온갖 농사를 지을 때는 퍼내는 것이 아까운 줄도 몰랐지만 농사를 확 줄여버린 지금은 손님에게 내 줄 것이 없어 아쉽다.
어둠살이 내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은 맑게 갰다. 바람이 시원하다. 얼마 만에 맛보는 찬바람인가. 냉방기를 껐다. 시원한 자연바람이 좋아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내일 아무리 뜨거워도 땡볕이 나면 좋겠다.
당분간 소나기가 있단다. 건조기에 넣자니까 고집을 피우네.
농부의 눈이 째려본다. 건조기를 두고도 태양초를 고집하는 나를 나무라는 셈이다. 나는 눈을 내리 깔고 거실에 놓인 마른고추 다래기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앉는다. 가스랑, 가스랑, 반질반질 윤기 도는 바짝 마른 붉은 고추가 사랑스러워 자꾸 뒤적거린다. ‘고추야, 부탁해. 열 근 정도만 거둘 수 있기를.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건조기 돌리자는 것을 보니 애가 타나 베 무공해 태양초 아무나 먹을 수 있나. 고추야, 너희들만 믿는다.’ 고추 한 주먹을 쥐고 볼에 댄다. 농부는 어이없는 표정이다.
여보, 입추가 언제지? 입추만 지나면 바람의 맛이 달라지잖아. 소나기도 덜할 거고. 햇볕만 좋으면 까슬까슬 고추도 잘 마를 거야. 한여름 땡볕이 반갑고 고마운 건 잘 익은 고추 덕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