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겠나. 인연이 끝난 걸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다.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진다. 새들도 조용하다. 나무우듬지조차 기립자세다. 태풍오기 전 전야제는 고요하다. 탈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난달 같았던 집이 30여 년이 흐르는 사이 나무에 둘러싸였다. 숲은 숲대로 울창해지고, 집에 심었던 나무도 어우러졌다. 농부가 솎아 베어낸 나무의 자리에 남은 밑동이 안쓰러워 보일 때가 있다. 특히 산딸나무와 앵두나무다. 봄이면 화사한 꽃을 피워주고 빨간 열매를 맺어주던 두 그루 나무는 서로 이웃해 자랐었다. 산딸나무는 저절로 고사했고, 앵두나무는 차나무가 배게 되면서 베어냈다.
어쩌겠나. 인연이 끝난 걸. 정성 들여 키웠던 나무지만. 마당가를 빙 둘러 심었던 사철나무 울타리도 차나무 울타리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난쟁이 키 재기를 하던 차나무가 이젠 내 가슴까지 올라온다. 찻잎 따기도 버겁다. 농부에게 차나무 다듬을 때 키를 좀 낮추면 좋겠다고 했다. 유월 중순인데 부드러운 찻잎이 자꾸 나를 끌어당긴다. 비 그치면 찻잎을 따야겠다. 비비지 않고 살청만 해서 말린 녹차를 우려먹고 있다. 맛이 괜찮다. 체지방도 빼 준다는 녹차다. 물처럼 우려 놓고 마시기에 제격이다.
한 자리에 오래 살면서 내게 익숙한 주변이지만 늘 봐도 새롭다. 다년생 야생화가 철 따라 피어나는 것도 신기하다. 무심히 지나치다가도 처음처럼 반짝 빛나는 꽃들이 마음에 담긴다. 오늘은 석류꽃이다. 발그레한 석류꽃이 참 곱다. 꽃은 무성한데 제대로 여물 석류는 몇 개나 될지. 석류나무는 석류를 몇 개라도 주는 해도 있고, 한 개도 안 주는 해도 있다. 욕심내지 않는다. 투정도 부리지 않는다. 주는 대로 거둔다. 매실이나 석류 같은 과실수는 병충해를 잡아줘야 열매가 실한데 약을 치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 주면 받고, 안 주면 그만이다.
딸은 새벽차를 타고 떠났다. 부산에서 한다는 1박 2일 명상모임에 참여하러 갔다. 대학시절 명상을 접한 딸은 꾸준히 간화선 명상을 하는 중이다. 농부는 간화선 명상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꿰뚫어 본다는 위빠사나 명상법으로 갈아탔다. 어떤 명상법이든 명상의 본질은 하나다. 마음 챙김이다. 내면의 평온함을 찾을 수 있고, 현재에 집중하면 잡념을 떨쳐버릴 수 있다. 정신건강에 좋다. 농부는 내게도 명상을 권한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명쾌하다.
“우리 집은 도사가 둘이나 되는데 나까지 도 닦으면 집안 망해. 나는 가장 인간답게 희로애락을 즐기며 살 거야. 도 닦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 도 닦는데 태클을 거는 사람이 없어봐. 마음공부 제대로 못하지. 당신은 내게 고마워해 돼. 내가 명상하는데 일조하니까.”
꽃무늬가 예쁜 우산을 쓰고 수영장에 갔다. 수영을 하고 나오니 우산꽂이에 꽂아 둔 내 우산이 없다. 누군가 먼저 나간 사람이 가져갔나 보다. 사무실에 알렸더니 사무실용 여분으로 둔 우산을 준다. 토요일이니 손님 다 나가고 수영장 문 닫을 때 남은 우산이 있으면 챙겨두라고 했다. 남는 우산은 내 우산을 가져간 손님의 우산일 확률이 높다. 아침부터 비가 왔으니 우산 안 갖고 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인이 되면 자꾸 헷갈리게 된다. 내 우산과 비슷한 색깔의 우산이 아니었을까.
지난핸가 어떤 아주머니가 신발장에 둔 신발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는 사무실에서 준 슬리퍼를 신고 집에 갔다. 사무실 직원에게 수영장 문 닫을 때 신발장에 남아있는 신발이 있으면 챙겨두라고 했었다.
며칠 지난 후 신발을 잃어버린 아주머니의 신발이 신발장에 놓여 있었다. 그 신발을 신고 온 사람을 찾으니 칠십 대 후반의 아주머니였다. ‘내 신발인데 와 그라요?’ 했다. 진짜 신발 주인이 ‘이틀 전에 잃어버린 내 신발이요. 여기 표시가 있잖소.’ 했다. 사무실 직원에게 보관해 둔 신발이 있으면 가져오라 했다. 비슷한 신발 두 켤레를 놓고 두 사람이 대질을 했다. 그제야 남의 신발을 신고 갔던 할머니가 ‘아이가 이기 내 신발이네. 비슷해서 착각했네.’하는 것이었다. 날마다 신는 신발도 자신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헷갈리는 나이를 사는 것이 노인의 길이다. 이순 넘으면 확인하고 또 해도 실수가 나온다. 내 우산을 가져간 누군가도 헷갈렸을 것이다.
사무실 여직원이 난처해한다.
“괜찮아요. 우산 하나 선물한 셈 치면 돼요. 자기 우산 아니라는 것을 알면 다음에 비 올 때 쓰고 왔다가 바꾸어갈지 모르잖아요. 남은 우산이나 잘 챙겨두세요.”
내가 아끼는 물건은 하찮은 것이라도 소중하다. 내 손때가 묻는 사이 정이 들어서 그럴 거다. 헌 우산이라도 우산살이 하나 비틀거려도 내 눈에 들어 즐겨 썼다면 남의 새 우산보다 정이 깊다. 오늘 내 손을 떠난 꽃무늬 우산도 그렇다. ‘엄마, 내 우산 줄게.’ 집에 있는 낡은 우산을 치우면서 딸이 준 선물이다. 낡아도 편하고 좋은 것은 딸과 내가 그 우산에 이어져 있다는 느낌 때문일지 모르겠다. 우산은 나와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내게 돌아올 것이고, 나와 인연이 끝났다면 돌아오지 않을 테지. 어쩌겠나. 내 손을 떠난 우산은 이미 내것이 아닌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