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참 좋다.
이틀째 비가 내린다. 후덥지근하고 꿉꿉하다. 냉방기를 켜고 제습과 공기청정을 누른다. 찬 공기는 밑으로 내려가고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온다. 이층 컴퓨터 앞에 앉았더니 덥다. 선풍기를 돌린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창문을 닫으면 차량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냉방기 돌아가는 소리만 자욱하다. 유리창 너머 빗줄기를 바라본다. 아슴아슴 보이는 마을 옆의 들판도 모내기를 끝냈다. 농번기다. 거리에 옥수수가 등장했다.
유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 비 오는 날은 쉬는 날이었다. 노동으로 지친 몸을 풀어줘야 하는 날이지만 고사리 농사가 주업일 때는 비 오는 날도 고됐다. 비 오는 날이 고마웠던 것은 단감과수원에 갈 일이 없는 농부가 건고사리 포장작업을 도와주곤 했다. 건고사리 포장은 오로지 내 몫이었기에 틈날 때마다 종종걸음을 쳤었다. 고사리 주문처를 챙기고 개인의 주문량을 확인해 택배로 보내야 했다. 건고사리는 미세먼지가 많이 난다. 건고사리 포장작업 시 마스크는 필수다.
그때 대량으로 사서 보관했던 마스크가 효자노릇을 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했던 첫 해였다. 마스크 품귀현상이 일어나 약국에서 마스크를 구입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비축했던 마스크의 여분을 요긴하게 썼고 마스크를 못 구한 지인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줬다. 마스크를 안 하면 당장 코로나에 걸려 죽을 것처럼 불안감이 조성됐던 3년 간 마스크 업계는 호황을 누렸을 것이다. 지금도 일상에서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일이 아니다. 나이 들수록 햇볕을 쬐어 줘야 면역성이 생긴다는데.
거실의 카펫을 걷었다. 무거운 카펫을 어찌하나 고민한다. 노인이 되면 이불 빨래는 힘들다. 세탁기에 넣고 빼고 너는 것도 힘에 부친다. 우리 집 세탁기는 용량도 적은 골동품이다. 겨우내 거실바닥에 깔았던 카펫은 내 힘으로 들기도 힘들다. 큰 고무 통에 담가 지근지근 밟을 수는 있지만 건져서 물을 뺄 자신이 없다. 농부에게 부탁했더니 면소의 빨래방을 이용하란다. 면사무소에서 빨래방을 운영한단다. 한 번도 이용한 적이 없다. 노인을 위한 배려차원이란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은 마을이장에게 신청하면 된단다.
면사무소에 갔다. 담당자를 만났다. 마을별로 요일을 정해서 이불빨래를 해 준단다. 뽀송하게 건조까지 돼 나온단다. 우리 마을은 월요일이다. 농촌의 빨래방운영, 참 잘하는 일이다. 월요일 아침, 농부에게 무거운 카펫과 두툼한 겨울이불 보따리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빨래가 다 되면 찾아가라는데. 전화를 부탁한다며 전화번호를 기입해 놓고 나왔다. 홀가분하다. 노인의 이불빨래 해 주기 프로젝트는 누가 낸 아이디어인지 참 잘한 것 같다. 농촌은 평균 연령이 팔십 대다. 해마다 노인은 집지킴이로 붙박이가 되어가는 추세다. 자식들이 다녀가며 덮었던 이불도 손수 빨거나 꾸밀 힘도 없다. 노인은 하룻밤 자고 가기 바쁜 자식에게 이불 빨래 좀 해 놓고 가라는 말도 못 한다.
예전에 시댁에도 그랬다. 도시 형제자매들 다녀간 뒤에 뒷정리는 늘 내 차지였다. 나잇살이 늘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한 나는 농사짓기도 두 어른 모시기도 벅찼다. 끝이 보이지 않는 두 집 살림에 지쳐갔었다. ‘자기네 덥던 이불이라도 좀 빨아놓고 가지.’ 불만이 고개를 들었다. 하필 그즈음 동서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자기네 덥던 이불을 빨아놓지 않았다고 한소리 하는 것이었다. ‘자네들 덥던 이불이잖아. 빨아놓고 가면 어디가 덧나?’ 쏘아주었다. 덕분에 형님과 아주버님이 큰 고무 통에 이불을 담아 지근지근 밟아서 빨아 널어놓고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다. 이불이나 베개 호청 벗겨 세탁기 돌리면 되는데. 시어머님이 상노인이 되면서 내가 늘 해 왔던 일인데. 왜 그때는 그 모든 게 힘들고 고단했을까. 형제자매도 자기네 가족 건사하기도 벅찼을 것이다. 내가 시부모님 곁에 사니 시부모님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을 것이다. 그 당연하다는 것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아닐까.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에 틈이 생기는 것은 세월 탓이기도 하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이타적 삶을 운운하지만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하기 어렵다. 삶에 있어 가족이라 묶지만 부부도 형제자매도 개인이다.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어쨌든 면사무소에서 운영하는 빨래방 덕에 카펫과 두툼한 겨울이불을 수월하게 빨 수 있어 좋다. 딸에게 빨래방에서 빤 이불을 햇볕에 널어 다시 말려야 하는지 물었다.
엄마, 괜찮아. 뽀송하게 말려서 주니 그대로 보관해도 될 거야.
좋다.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