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잎의 위로
가을이 참 느슨하다. 단감이 적으니 일도 적지만 수익도 적다. 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드디어 목욕을 한 나뭇잎이 알록달록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바람이 휙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은 노래를 한다. 가을정취를 느낀다. 입동도 지났는데 이제야 가을 맛이 나는 나날이다. 단감고장이라 단감 수확도 끝나간다. 길가에서 난전을 벌여놓고 단감을 따서 파는 농가도 있고, 진작 봉지작업해서 저장고에 넣는 농가도 있다. 우리도 단감이 많았다면 봉지작업하기 한창일 것이다. 소매로 팔 것도 없다. 오랜 지기들이 주문을 해도 몇 박스만 보낼 수 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못난이가 많다. 늦장마로 치명타를 입었다. 과수원에서 병든 것은 저절로 홍시가 되어 떨어지거나 농부가 따서 버린다. 성하다 싶어 따 온 단감도 성한 것이 귀하다. 해마다 우리 집은 못난이가 많지만 올해는 유난히 심하다. 못난이라도 광고해볼까 하다가 고개를 흔든다. 선물로 나누고 말자. 못난이라도 단단하고 험과 적은 것은 골라내 못난이 주문 온 곳에 보내고 나머지는 여기저기 나누어준다. 못난이도 먹는 데는 아무 이상 없다. ‘자네 집 단감 맛이야 알지. 공짜로 얻어 묵기는 하는데 농사가 이래서 어쩌누.’ 걱정해주는 마음 덕에 살아낼 것 같다.
지인으로부터 단감 주문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선물용이다. 해마다 가장 굵고 좋은 단감을 주문하는 오랜 지인이다. 나는 또 ‘올해는 단감이 없어요. 유기농 구사하다가 폭삭 주저앉았어요. 굵고 좋은 단감은 더 귀해요. 일단 몇 박스나 나올지 작업해보고 연락드릴 게요. 꼭 선물해야 할 1순위만 챙겨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안합니다. 내년에 농사 잘 지어 보답할게요.’ 문자를 보내며 가슴이 아리다. 단감 수확 철에는 통장에 꽂히는 돈만 봐도 배가 불렀는데. 수확량이 평년의 5분의 1도 안 된다. 마지막 수확일이 남은 지금쯤이면 몇 백 박스가 택배로 나가야 하는데. 선물할 곳부터 챙겼으니 택배비가 더 나올 것 같다.
더구나 택배사고까지 겹쳤다. 이삼일 사이 한두 곳도 아니라 서너 곳의 택배사고 소식이 오자 <머피의 법칙>을 생각한다. 잘못 될 수 있는 일은 결국 잘못 된다는. 단감 몇 백 박스를 택배로 보낼 때도 택배사고는 한두 건이 고작이었다. 겨우 몇 십 박스 보냈는데 세 건이나 택배사고가 터진 것이다. 감이 깨어졌거나 멍든 사진이었다. 해마다 우리 집 단감을 몇 박스 씩 주문해 지인들께 선물한 단감이 꼭 탈이 난다. 단감이 많을 때는 같은 크기의 단감을 새로 보내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올해는 보낼 단감이 없는 것이다. 단감을 따오자마자 선별해서 택배로 부쳐 버리면 남는 것은 못난이다. 환불 조치를 할 수밖에. 환불 안 받겠다는 집도 있지만 주고받는 것은 공평해야 서로가 편하다.
첫 단감을 보냈을 때다. 단감을 받은 사람이 정품인데도 험과가 섞였다는 것이다. 내 손으로 요리조리 신중하게 골라냈는데도 험과가 들어간 것이다. 농부가 아끼는 사람이라 선물 겸해서 일부러 굵고 좋은 단감을 보냈는데. 믿었던 사람이 딴죽을 건 것이다. 유기농하려다 실농했다고. 미안하다고. 수량도 적고 정품도 귀하다고. 단감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던 나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쩌겠나. 나보다 농부가 더 힘들 것 같아 ‘괜찮아요. 올해는 선물로 돌립시다. 사정이야기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어준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그런가. 계속 불미스런 일이 생긴다. ‘진짜 머피의 법칙이 적용된 건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며느리가 복덩이라서 그래.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덜 좋아야 공평한 거지. 앞으로 셀리의 법칙이 적용될 거야.’ 마음을 비운다. <셀리의 법칙>은 잘 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잘 된다고 했다. <셀리의 법칙>이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기적이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기적이라 했다. 큰 욕심 안 부리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짓는 단감도 계획했던 수익을 못 내주니 기적이라도 부르고 싶다. ‘잘 될 거야. 여태 잘 살았잖아. 또 다른 일거리가 생기겠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나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이 정도로 힘들다 생각하면 욕심 부리는 거야. 내 복만큼 살길이 생길 거야.’ 내가 나에게 조언하고 위로한다.
지인은 되는대로 보내달란다. 굵고 좋은 것부터 차례대로 중간크기까지 챙겨 보내기로 했다. ‘희경 샘, 복 들어가요. 고맙습니다.’ 아마도 올해 단감 판매는 지인 덕에 거름 값과 박스 값은 건질 수 있을 것 같고 판매도 완료될 것 같아 고맙고 또 고맙다.
바람이 차다. 마당을 구르는 가랑잎의 노래를 듣는다. 가랑잎도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사그랑 사그랑 흔들리며 떨어져 내린다. ‘괜찮아요. 내년에는 대복이 들어올 겁니다. 달도 차면 기울잖아요.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가랑잎의 위로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