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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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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y 14. 2022

37. 녹두죽 끓이다.

녹두죽 끓이다.   

   

  녹두를 삶았다. 녹두죽을 좋아하시는 시어른이다. 새댁 시절부터 병치레 잦았던 노인이다. 살림이라고는 백치였던 내가 시집오자마자 온갖 죽이란 죽은 다 끓여 대야 했다. 입도 짧아서 한 번 드시면 내치셨다. 그중에 녹두죽을 즐겼다. 일 년 내내 수시로 녹두죽을 끓여 대령해야 했다. 시어머님은 해마다 녹두를 심어 거두었다. 녹두는 이른 아침에 이슬 걷히기 전에 익은 꼬투리를 따야 터지지 않는다. 시어머님과 나는 일을 삼고 녹두 꼬투리를 땄다. 새벽잠 많았던 나는 잠 좀 푸지게 자 봤으면 소원할 정도였다. 


 녹두를 삶아 믹스기에 곱게 갈았다. 원래는 소쿠리나 체에 걸러 껍질을 벗겼지만 편법을 사용했다. 불려놨던 찹쌀을 먼저 저어가며 끓이다가 쌀 알갱이가 퍼졌을 때 믹스기로 간 녹두를 붓는다. 녹두죽은 뭉긋하게 끓여야 찰지고 맛나다. 마지막 굵은소금을 넣어 간을 한 후 한 소금 더 끓여 속이 깊은 냄비에 담았다. 농부는 죽을 들고 시부의 저녁을 차려드리러 갔다. 내가 끓여드리는 녹두죽을 젤 맛있다 하시던 어른이다.   


  아침에 시댁에 다녀온 농부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버님은 어때요?’ ‘그대로다.’ ‘아침에 일어나긴 했어요?’ ‘일으켜 드려야 앉는다.’며 기저귀도 빼 버리고 옷도 홀랑 벗고 계시더란다. 밤새 채워놨던 변기 비우고 씻고, 몸 닦아 드리고 지린 옷 갈아입혀드리고 아침 차려드렸다는 농부다. ‘아야, 아야,’ 앓는 소리를 달고 있는 노인을 돌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시아버님도 치매환자지만 자식들은 아무도 모른다. 노인은 평생 당신의 손발이 되어준 농부를 밉단다. 퇴원하겠다고 부른 자식도 삼촌이다. 삼촌 대신 농부가 갔었다. 노인을 휠체어에 태워 집으로 모셨다. 며칠 모셔보고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시모도 안 계신 편한 집을 두고 요양원에 가시겠느냐는 거다. 답답하고 슬프다. 백 년은 너끈히 사실 것 같았던 시어른께서 죽음을 목전에 둔 모습이다. 시모를 요양원으로 잘 모신 것 같다. 자리보전하고 누운 두 노인을 간병하기는 더 힘들었을 텐데. 농부가 얼마나 힘들까. 시부의 상태를 전문인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현재 요양원에 간호사로 있는 후배를 청했다. 마침 쉬는 날이란다. ‘점심 살게 올래?’ 농부랑 셋이 만났다. 농부는 묻고 후배는 답했다. 전문가와 상담을 하니 훨씬 낫단다. 


  후배를 데리고 시댁에 갔다. 시부께서 기력이 뚝 떨어져 보였다. 어제는 살아나시는 것 같더니 도로 주저앉았다. 얼굴 혈색도 거무스름하고 여전히 오른쪽 손발은 부어 있다. ‘할아버지 진맥 좀 해 볼게요.’ 해도 ‘응응’ 대답만 하고 까라지신다. 아프다고 짜증 낼 기운도 없는 것 같다. 삶을 포기하신 것일까.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일까. 형형하던 눈빛이 사라졌다. 어지럽냐고 물었다. 어지럽지는 않단다.


 다시 찻집에 앉았다. 후배는 시부가 노쇠해서 기력이 완전히 바닥나신 것 같다며 요양원보다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단다. 집에서 간병하기에는 무리란다. 편안하게 돌아가실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시부의 소원대로 집에서 임종할 때까지 모셔야 할까. 사람의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은 편하게 모셔드리고 싶다. 

 

 막상 시부께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먹먹하다.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마지막에 미움도 받았다. ‘네가 왔나?’며 반기시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아버님 저 왔어요.’ 고함을 질러도 ‘응응’ 표정 없이 대답만 하신다. 삶을 포기하신 것일까. 곰국도 잘 드시고 된장에 무친 머위나물도 잘 드시는데. 상노인은 하루 반짝이라는 말도 있다. 조금 전까지 말짱하시다 금세 돌아가시는 수도 있단다.

 

 저녁상을 차려놓고 농부를 기다렸다. 어둠살이 깔리는 마당도 새파랗다. 농부가 왔다. 시어른께서 녹두죽 반응이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잘 드셨다.’ 농부의 대답은 간결하다.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괜찮았나 보다. 노인이 녹두죽 드시고 기운 좀 차렸으면 좋겠다. 농부 앞에 남은 녹두죽 한 그릇을 놓았다. ‘맛있네.’ 평소 칭찬도 빈말도 할 줄 모르는 농부가 맛있다면 진짜 맛있는 거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밥을 먹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모실 때까지는 마음 편하게 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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