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과 아이

by 어둠의 극락

다음날, 고섭은 진영이 걱정되어 해가 다 뜨지도 않은 새벽부터 관아로 향하였다.

“영감, 고섭입니다.”

“들어오게.”

고섭이 집무실로 들어가니 진영이 탁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한숨도 못 잤는지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고, 반쯤 감긴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영감, 무엇을 쓰고 계십니까?”

“응, 사직서일세.”

“예?”

고섭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영은 끝내 다 포기하고 관직을 내려놓으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진정으로 사직하려는 것은 아닐세. 내가 조정으로 가서 사직하겠다고 하면 사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조판서를 비롯한 육조의 판서들이 나를 대면하려 할 테니까. 그런 다음 그 자리에서 이 사건을 거론하려 하네.”

진영의 계책에 고섭은 안도의 웃음이 얼굴에 떠올랐다.

“대단하십니다, 영감. 지금 곧장 한성으로 가시렵니까?”

“그래. 서두를수록 좋지.”

“허면 소관이 모시겠습니다. 가시지요.”

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과 고섭은 빠르게 말을 몰아 한양으로 향하였다. 어제와는 달리 마음도 발걸음도 무척 가볍게 느껴졌다. 비록 생각해 낸 방법이 상급자들을 속이는 기만술이기는 하였으나 달리 길이 없었다. 진영은 이미 어떤 비난과 책망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진영과 고섭은 이윽고 광주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지름길에 접어들었다. 바로 어제도 지났던 길이었으나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들 외에 지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새들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 그들은 말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잘 달리던 말들이 갑자기 멋대로 속도를 줄이더니 멈춰 섰다.

“이랴! 이랴! 아니, 이 녀석들이 왜 이러나?”

“소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이랴!”

아무리 옆구리를 발로 차고 채찍으로 엉덩이를 때려도 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떤 불길한 기운을 느낀 것처럼 선 자리에서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였다.

“영감,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두려움은 점차 진영의 마음에도 깃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억눌리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고섭은 몹시 불안하여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크르르르-

어디선가 천둥 같은 소리가 들리자 말들이 울부짖으며 흥분하였다. 저만치 앞에서 커다란 호랑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진영은 말 등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영감! 괜찮으십니까?”

고섭은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쓰러진 진영을 부축하였다. 말들은 왔던 길로 돌아서 달아나 버렸다. 호랑이는 달아나는 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땅이 울리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진영과 고섭에게 접근하였다. 둘은 서둘러 지니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날이 시퍼런 칼을 보고도 호랑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으르렁대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진영과 고섭은 그 기세에 눌려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으아악!”

호랑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날렸다. 진영은 머리를 감싸며 엎드렸고 고섭은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넘어졌다.

휘이익-

별안간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달리던 호랑이는 멈춰서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무언가가 나무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호랑이에게 날아들었다.

크아아아!

한 방 얻어맞은 호랑이는 짜증스럽게 몸을 흔들며 포효하였다. 호랑이를 공격한 그 존재는 진영과 고섭의 눈앞에 착지하여 그들을 막아섰다. 진영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낡은 삿갓을 쓴 사람이었다. 체구가 크지는 않았으나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 없이 호랑이에게 맞서고 있었다. 칼을 들고 있던 진영과 고섭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호랑이가 그 인물에게는 으르렁거리며 위협만 할 뿐 더 다가가지 못하였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며 이어지던 그들의 신경전은 호랑이가 먼저 물러나며 끝이 났다. 호랑이가 사라지자 진영은 그제야 안도하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가?”

진영은 곁에 쓰러져있던 고섭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영감. 영감께서도 괜찮으신지요?”

고섭은 진영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들은 옷을 털며 생명의 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에게 목숨을 빚졌구먼. 도와주어 고맙네.”

진영이 감사를 표하자 갓 쓴 사람이 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진영과 고섭은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랑이를 물리친 기백과는 달리 갓 아래에 있는 얼굴은 너무도 앳되고 곱상하였다. 마치 젊은 여인이 남장을 한 듯한 어색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는데, 칼자루 끝에 물고기처럼 보이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보기 딱하여 도와드렸을 뿐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 또한 영락없는 여인의 것이었다. 진영은 그 광경이 너무도 신기하여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보아하니 어느 고을의 사또이신 듯한데,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 길이었는지요?”

넋을 놓고 있던 진영은 여인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흠칫하며 답하였다.

“음? 아, 한성으로 가는 길이었네. 나는 광주 부윤인데 조정에 아뢸 일이 있어서 그리로 가다가 범을 마주치게 되었다네.”

“광주요? 허면 조정에 아뢴다는 일이 혹 그 살인 사건에 관한 것입니까? 사람이 포처럼 말라서 죽었다고 하는?”

진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낯선 외지인까지도 그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다른 지역에까지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고섭이 말을 잃은 진영 대신 나서서 대답하였다.

“그렇다네. 그대는 멀리서부터 온 듯한데 그 일에 대하여 알고 있군. 이미 다른 지역에도 다 알려진 모양일세.”

“그렇습니다. 쇤네도 그 소문을 듣고 광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만, 도중에 이렇게 그곳의 사또를 먼저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광주로 가던 중이었다고? 그곳의 사정을 알면서도 그리로 가고 있었단 말인가? 대체 연유가 무엇인가?”

고섭의 물음에 알 수 없는 웃음이 여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야 어떤 흉악한 놈이 그런 짓을 하는지 그 상판을 보기 위함이지요.”

“뭐라? 지금 농을 하는 건가? 범인은 우리가 가용한 인력을 최대한 동원하고도 찾지 못하고 있네. 보아하니 아직 혼기도 차지 않은 처자가 어찌 그리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왠지 장난스러운 여인의 말과 태도에 고섭은 성을 내었다. 말이 없던 진영은 무언가 떠오른 듯 손을 들어 고섭을 제지하며 여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범인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그대가 직접 추적해 보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미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써보았으나 더는 범인을 잡을 길이 보이지를 않아. 만일 그대가 우리를 도와 범인을 잡는다면 포상은 후하게 해 주겠네. 어떤가?”

진영의 제안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자, 그러면 관아로 돌아가시지요.”

여인은 광주로 가는 방향으로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잠깐 기다리게. 우리가 타고 온 말들을 되찾아야 하네. 아까 범에게 놀라서 달아나 버렸어.”

“둘 다 이리로 돌아오는 중이니 잡아서 타고 가시면 됩니다.”

“뭐라?”

이윽고 여인의 말대로 정말 달아났던 말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그 뒤로 한 어린 여자아이가 붉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말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마치 그 아이가 말들을 몰아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영과 고섭은 재빨리 고삐를 잡아 말들을 세웠다. 아이는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여인을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잘했어. 이제 가자. 어서 오르시지요.”

여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신기한 광경에 진영과 고섭은 말에 올라타면서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용어 해석>

이조 : 육조의 하나. 인사 관리를 담당함.

판서 : 육조의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