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의 인구조사> 이야기
여행지 선정은 누구나 그렇듯 지극히 주관적인 이유에서 이뤄진다. 내게 벨기에 브뤼셀 방문도 마찬 가지 경우였다. 브뤼헐의 그림이 보고 싶었다. 피테르 브뤼헐. 그의 그림이 가장 많은 곳은 빈 미술사 박물관이고 두번째로 많은 곳이 브뤼셀 왕립미술관이었다.
브뤼헐의 그림은 참 독특하다. 16세기를 산 사람인데 때로는 기괴함과 상상력 가득한 그림을 선보였고, 상징과 교훈 가득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농촌 등 일상의 풍경을 전달하기도 했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걸어 나오는 노인이 있고 험악한 세상사의 한 귀퉁이에서 놀이에 빠진 아이들의 동심도 있다. 내겐 더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게 이런 브뤼헐의 그림이었다. 시대로 치면 중세의 끝자락 정도를 살던 브뤼헐은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됐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일단 태어난 해는 불명확하지만 그가 1569년에 죽었다는 사실은 눈 여겨 볼만했다. 4,5년 전인 1564년에서 1565년 사이 그가 살던 안트베르펜은 1250년 이래 가장 추운 겨울을 겪었다. 당시 지독한 추위가 유럽 전역, 특히 네덜란드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농사가 기본인 사회에서 이런 추위는 다른 말로 배고픔을 뜻한다. 민심은 흉흉해지고 삶은 각박해진다. 당연히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 시절 그가 그린 그림이 <베를레헴의 인구조사>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금을 걷으려고 호적조사를 하는 바람에 만삭의 마리아는 출산 하루 전날 베들레헴에 도착한다. 성서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는데 베들레헴이라 했지만 플랑드르 지방을 그리고 있다. 브뤼헐 그림의 특징은 숨은 그림 찾기 같은 매력이다.
일단 이 그림에선 아이들의 놀이가 눈길을 끈다. 팽이 치는 모습, 스케이트를 타려고 끈을 매는 아이, 썰매 타는 모습, 눈싸움의 모습 등 확대경을 비추면 그림 배경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이렇게 겨울을 그린 첫 화가는 브뤼헐이다.
게다가 당시는 정치 종교적으로도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이후 네덜란드는 신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구교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구교를 사수하고자 했던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침공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알바 공작의 이름이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알바 공작은 17,0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네덜란드를 유린했다. 피의 학살이었다. 불과 2년 동안 네덜란드 사람 1만 명 이상이 재판받았고, 천 명 이상이 처형됐다. 당시 브뤼헐은 네덜란드가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을 상상이나 했을까? 네덜란드의 눈물을 경험하면서 이 시대의 이야기들이 그의 그림에 담겨있다.
그 대표적인 그림이 <베들레헴의 영아 학살>이다. 역시 성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림이지만, 브뤼헐은 로마 병정을, 창을 들고 검은 갑옷을 입은 에스파냐 기병대 모습으로 그림 속에 담았다.
이렇게 신화나 성서 속의 소재를 바탕으로 풍경이나 일상의 이야기를 작가가 표현할 수 있게 된 데는 종교개혁도 한몫을 했다. 사실 네덜란드의 신교 교회를 방문해보면 화려함은 거리가 먼 소박한 내부 장식에 놀라곤 한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성상파괴였다. ‘오직 성서, 오직 믿음만으로’를 강조한 것이다. 구교 가톨릭에서 교회 내, 외부를 장식했던 성상, 성화에 대한 파괴가 이어졌다. 우상숭배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종교가 형상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서 부대효과가 생겼다. 그림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성화만 그리던 세상에서 세속 세계나 풍경을 그릴 수 있게 됐다. 16세기 후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그림의 소재가 됐고 17세기 네덜란드는 풍속화의 전성기를 맞는다. <베들레헴에서의 인구조사> 그림에서 돼지 방광에 바람을 불어넣는 아이의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그 시절 네덜란드에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공을 찼나 보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쉽게 느끼는 대목을 짚고 가야겠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는 이런 플랑드르 회화를 지독하게도 폄훼했다.
포르투갈 사람 홀란다 F de Hollanda가 쓴 <회화에 대하여, 미켈란젤로와의 대화>를 보면 미켈란젤로는 "플랑드르 회화는 주름진 옷자락, 오두막집, 푸른 초원, 나무 그늘, 다리와 개울물 등 그들이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다 군데군데 장난감 같은 사람을 집어넣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혹자의 눈에는 괜찮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예술성도 없고 논리도 없으며 대칭도 없고 비례도 없으며 엄격한 선택도 없고 분별력도 없으며 데생도 없다. 한 마디로 말해 골격도 없고 힘줄도 없다"고 혹평했다.
오두막집이나 개울물 같은 잡스러운 현실에선 도덕적 이상이나 장엄함이 없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화가들이 여인의 옷 주름이나 아이의 머리에서 이를 잡는 어머니, 사과 깎는 여인을 그릴 때, 어쩌면 그들은 세상 모든 존재 속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왕의 대관식 광경이나 경외로운 신의 모습, 여신의 이야기나 신화 속 장면만 그리는 것인 줄 알았더니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상’도 그림의 중앙에 당당하게 자리 잡게 되는 날이 곧 올 테니 말이다. 근육질의 과장된 붓질과 인체 비례에 대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 말고도 그냥 ‘장난감 같은 사람’들로도 현실 속 진솔한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고 그게 작가의 시선이 아닐까?
일상에서 아름다움과 삶의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회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중세의 끝자락에서 근대를 그림으로 열고 있는 피테르 브뤼헐이 브뤼셀 왕립미술관에서 전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