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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Aug 06. 2021

시선이 바다를 향하는 곳, 마르세유

‘지중해 문명’ 이야기

마르세유 하면 생각나는 것? 아마도 프랑스 축구선수 지단의 개인기 '마르세유 턴'부터 떠오르려나? 뒤마의 작품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마르세유의 이프 섬(Château d’If)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아님 범죄도시의 선입관? 그럼 생각나지 않는 것은? 일단 대표적인 지식인이나 문인? 대학의 이름 같은 게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문외한이라 그럴 순 있다.

마르세유 기차역에 내렸던 날은 무더운 여름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역사 밖으로 나왔다가 숨이 턱 먹혔다. 계단이 끝없이 펼쳐지는데 그 흔한 경사로도 에스컬레이터도 없다. 별 수 있나? 무거운 짐을 끌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망망대해가 따로 없다. 숨이 턱턱 막힌다.


겨우 도착한 평지. 큰길 말고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앉아있는 주민들의 눈초리가 환대와는 거리가 멀다. 아무래도 범죄 조심하란 얘길 하도 들어서 생긴 선입관 때문일 것이다. 설상가상이다. 가까스로 호텔에 도착했더니 방은 꼭대기라는데 엘리베이터가 잠시 고장이란다. 급한 마음에 캐리어를 들고 또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이런 소동들에 적응되고 해 질 녘이 되자, 도시는 금세 친숙해진다. 매력 넘치는 친구처럼.

이 도시에서 길은 늘 바다로 향한다. 길을 잃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골목을 헤매도 발걸음은 늘 자연스럽게 구항구(Vieux Port)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호화스러운 요트 앞에 생선 좌판이 펼쳐진다. 거주지 바로 앞에서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그 옆으로 여행자들이 수북하다.

이 도시애서 눈은 늘 성당으로 향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설까? 마르세유를 성당이 주는 인상은 외관부터 강렬하다. 성당 앞에서 바다는 마르세유가 선사하은 큰 즐거움이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그 성당이 그 성당 같아서, 성당 내부 방문을 생략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이곳 성당 Notre-Dame de la Garde에선 꼭 성당 내부로 들어가셔야 한다.

어부들의 안녕을 빌고 바다의 풍랑에서 생명을 지켜달란 기도가 성당을 만든 이유였다. 그래서 배가 걸려있는 본당 모습은 정말 이채롭다. 성당의 건축을 보면서 스페인 코르도바나 이탈리아 피렌체를 얘기하는 분들도 많다. 채색 대리석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항구 마르세유는 문화접변의 현장이었구나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만남은 그렇게 창조의 원동력이었다. 성당 밖으로 나올 때 우리의 시선은 다시 자연스럽게 시가지와 바다로 향하고 이프섬까지 뻗는다.

그렇다. 마르세유는 항구다. 기원전 600년 경 그리스의 식민지로 시작될 때부터 수많은 외부인이 이곳을 들락거렸다. 흥미로운 건 20세기 초에는 이탈리아인이 이곳 인구의 40%를 차지했다고 한다. 오죽 많았으면 '이탈리아의 점령'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마르세유를 마피아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시선고 이때 난들어졌다. 그러고 보면 산업혁명 이후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했던 이주 노동의 역사는 꽤 오래된 이야기들이다.


1차 세계대전 후엔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마르세유를 찾았다. 나라를 잃고 정치적 망명을 한 이들이다. 그 후 프랑스가 북아프리카 식민 지배를 하면서는 마그레브 지역의 사람들도 왔다. 알제리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마르세유는 탄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중해 사람들이 공존하고 융합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장이었다.  마르세유의 또 하나 독특한 정서 중 하나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다.  

이곳의 상징을 하나 고르라면 유럽 지중해 문명 박물관(MuCEM, Musée des civilisations de l’Europe et de la Méditerranée)을 꼽겠다. 구항구에서 바다로 향하며 걷다 보면 마르세유를 지키던 생장 요새(Fort Saint-Jean)와 과거 여객터미널이었던 J4를 금방 만난다. 물론 가는 길을 골목을 통해서 갔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골목마다 가득한 새롭고 독특한 풍광과 가게들이 발걸음을 빨리 할 수 없게 만드니까. 그 끝 바다 근처에서 발견하는 게  바로 뮤셈이다. 가로와 세로 모두 72m의 큐브 모양의 건축물이다.  구시가지에서 이곳 뮤셈으로 넘어가려면 높고 좁은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와 구항구의 전체 모습을 보면서 걷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다.

뮤셈은 외관부터 인상적이다. 그물 모양의 콘크리트가 큐브형 건물의 외관을 감싸고 있다. 사실 이 자체도 볼거리다. 박물관은 유리벽으로 만들고 그 밖에 이동통로를 만들면서 그물 모양의 콘크리트가 외벽을 둘러싸게 했다. 바닷바람은 통하면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바다로 향하는 시선은 유리 없이 틔워준다. 건축가 루디 리시오티(Rudy Riciotti)가 설계했다는데 '돌, 물, 바람'을 모티프로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TMI긴 한데 2002년에 만들어진 한강 선유교도 리시오티가 초강도 콘크리트를 사용해 설계한 것이다. 뮤셈을 방문했다면 일단 테라스에 설치된 의자에 몸을 누이고 낮잠 한숨 잘 것을 권한다. 책 한 권 읽어도 좋겠다. 그리고 여력이 되면 박물관 전시를 볼 일이다.

@musees. marseille.fr

박물관 상설전시는 지중해에 대한 프랑스의 시선을 담았다고 보면 된다. 신석기시대부터 근대까지 지중해 문명에 대한 고찰이다. 당연히 유물 전시가 있다. 자세히 보면 고대부터 정말 다양한 문자들이 출토유물에 쓰여있구나 느끼게 된다. 다양한 문명이 그때부터 합해진 셈이다. 게다가 지중해 바로 너머엔 예루살렘이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 생각해 보면 그리스 로마 문명에서부터 베니스를 거쳐 근대로 이어지는 해상활동과 이슬람의 정복과 전쟁이 이뤄진 배경이 지중해다. 유럽이 제국을 건설한 후엔 식민 지배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전시를 보면서 지중해 문명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경험은 특이한 체험이다.

@musees. marseille.fr

‘로마의 호수’에서 ‘비잔틴의 바다’로, ‘이슬람의 호수’로, ‘유럽의 바다’로, ‘터키의 바다’로, 다시 ‘유럽의 바다’로, 그리고 오늘은 ‘유럽-이슬람의 바다 ‘로 그 주역이 엇바뀌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문명의 주체도 오리엔트문명에서 에게해문명으로, 그리스 로마문명으로, 비잔틴문명으로, 이슬람문명으로, 서구기독교문명으로 출몰을 거듭해 왔다. 실로 지중해야말로 시공간적으로 기복무상하고 다종다기한 다면체이다. 정수일 <지중해 문명과 지중해학> p22


다만 철저하게 프랑스적인 시각에서 만들어진 전시란 점은 감안해야 한다. 지중해를 무대로 벌어진 갈등과 투쟁, 그 속에서 식민지를 사이에 두고 싸웠던 프랑스의 반성을 느끼긴 어렵다. 실제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 점령을 시작으로 1881년 튀니지, 1912년 동모로코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누가 뭐래도 북아프리카 지방에 지중해 제국을 건설하려 한 것이다. 그들의 바람엔 지중해가 '프랑스의 호수'였으면 좋겠다 싶었겠지만 그건 욕심일 것이다.  이곳 지중해 해변과 섬들에 살고 바다를 가로질렀던 사람들에게 지중해가 가졌던 의미를 하나씩 이해하는 게 어쩌면 우리한텐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뮤셈 관람은 비판적 관람을 권유한다.

차라리 이런 전시를 해줌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중세 시대 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까지 금서 취급을 할 때 이슬람은 그리스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칼리파 알-마문 시대엔 고대 서적들을 번역하기 위한 전문 번역기관 ‘지혜의 전당’까지 바그다드에 설립할 정도였다. 이곳에서  그리스의 철학, 과학, 의학 서적들이 아랍어로 번역됐고 지식이 축적됐다. 그리고 이 지식은 고스란히 나중에 유럽으로 전해진다. 르네상스가 꽃핀 이유가 이슬람이 전해준 고대의 지식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문화가 만나고 서로가 새로움을 만드는 바다, 그곳이 지중해가 아닐까? 그 바다 위에서 지배와 정복을 꿈꿨던 어떤 나라의 과거가 창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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