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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Aug 07. 2021

류블랴나, 안 보이는 게 더 중요한 곳

차 없는 구도심, 그들의 선택

류블랴나. 이 도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한 권의 소설 때문이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죽음에 대한 자각이 우리를 더 치열하게 살게 한다는 메시지, 그래서 “기적이야 하루를 또 살 수 있어”란 말이 매우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소설이다. 류블랴나는 도입부에 나온다.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이 마지막 편지를 쓰는데,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된 다섯 공화국 중 하나란 걸 알리는 내용이었다. ‘슬로베니아는 어디에 있는가’란 제목의 기사를 보고 화가 나서 쓴 거다. 슬로베니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수도 류블랴나는 말해 뭐할까?

류블랴나 광장에서 볼리비아 악사의 연주를 들으며 주인공 베로니카가 삶의 허무를 설파하는 장면은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소설을 읽으면서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찾아보고 새롭게 알게 된 도시 류블랴나의 첫인상은 그래서 궁금함이었다. 지금, 슬로베니아는 ‘꽃보다’ 시리즈가 유행하면서 알프스의 빙하로 만들어진 블레드 호수가 알려지고, 그러면서 친숙한 도시가 됐다.


벼르고 벼르다 결국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구도심을 거닐면서, 소박하지만 참 정감이 가는 평화로운 도시란 느낌이 새록새록했다.

블레드 섬의 성모승천 성당 (The Church of the Mother of God) 호수 주변 산책로는 6Km 정도다

왜 그랬을까? 그 비밀은 다음 날 류블랴나 성을 올라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확실해졌다. 도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 대부분 같을 것이다. 빽빽한 주거공간이나, 지하철과 트램, 주차장, 빌딩, 쇼핑센터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류블랴나 성에서 내려다본 도심의 모습은 녹색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어느 도시에서도 느낄 수 없던 차이는 바로 이 ‘녹색’이었다.

류블랴나 성에서 내려다본 구도심

류블랴나를 방문한다면 일단 눈앞에 없는 것에 주목하시라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구도심 안쪽엔 ‘차량’이 없다. 새벽녘에 쓰레기를 처리하는 전기차 한 대를 본 게 여행 내내 전부였으니까. 덕분에 우리는 걷는 속도에 맞춰 도시를 둘러볼 수 있었고, 어디선가 불쑥 차량이 나타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공기의 질은 당연히 매연이 없으니 쾌적했고, 소음을 걱정할 일도 없었다. 특히 저녁 무렵 산책을 하다 광장 한편에서 열린 공연에 맥주 한잔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참 흥겨운 순간이었다. 이런 삶도 가능하구나 느낄 때, 문득 그 모든 비밀의 열쇠가 바로 차 없는 광장이 주는 혜택이란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놀라운 건 류블랴나가 원래 이랬던 도시가 아니란 거다. 십몇 년 전만 해도 여느 도시처럼 구도심엔 주차장과 차량이 빼곡했다. 강을 따라 늘 교통 정체가 일어났다. 녹지 공간도 충분하다 싶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지금은 강을 따라 예쁜 카페와 음식점이 아름다운데 이 길에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들의 행렬만 가득했다니, 당연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도시가 변한 것이다.

일단 류블랴나를 변모시킨 ‘에코’ 계획은 2007년에 수립됐다. 당시 ‘비전 류블랴나 2025’로 불렸다. 그리고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 2008년부터 신속하게 추진됐다. 구도심 안쪽으로 차가 다닐 수 없게 한 건 혁신의 포인트였다. 주차장이 있던 자리엔 예쁜 카페가 들어섰다.

삼중교

그 이후 새로 심은 나무만 해도 2천 그루가 넘는다. 공원도 5개가 더 만들어졌다. 자전거 길도 정비됐다. 대중교통을 더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바꾸었다. 덕분에 보행자와 자전거의 천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우선순위를 둔 쪽은 보행자다. 자전거길도 마냥 속도를 즐기도록 만들어진 길이 아니란 얘기다. 그 후 류블랴나는 2016년 유럽의 ‘녹색 수도’로 선정된다. 집만 나서면 누구나 녹지를 거닐 수 있는 꿈의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류블랴나 시의 녹지 비율은 이제 75%에 달하는데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비율이다.


이 계획들의 중심에서 얀코빅Zoran Janković 시장도 한몫을 했다. 4년 임기 첫해에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였다. 그 결과 대기질이나 안전, 소음의 변화 등 삶의 질이 바뀌는 걸 경험한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총 5번, 시장에 당선된다. 이렇게 정책의 연속성을 얻으며 안정적으로 일을 추진한 점 역시 성공의 요인 중 하나다. 특히 활기찬 보행자 중심의 거리가 되자 상거래가 활성화됐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당연히 도시의 외관도 더 정비됐다. 정말 선순환이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과 Kavalir

무료로 이용 가능한 전기차 버스인 kavalir가 노약자들을 위해 운용 중이다. 타고 목적지를 말하면 되는 방식으로 운행되니 운 좋게 발견하면 경험해보길 권한다. 자주 보기는 어렵다.

사실 류블랴나에선 도심 한가운데 프레세르노프 광장에 장군이나 왕 대신 시인인 프레세렌의 동상이 있어서 흥미로왔다. 어느 도시가 시인을 가장 사랑하는 인물로 둘까? 게다가 이 나라의 애국가는 프레세렌 시인의 시 ‘축배’다. 시의 한 대목이다. "자유를 간절히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더 이상 적은 없고 이웃만 있으리". 문화의 날로 기념하며 쉬는 2월 8일은 그가 숨진 날이기도 하다.


시인을 이렇게 사랑한 주민들이 자신이 살고 싶은 도시의 모습, 미래 비전을 선택하고 투표하고 결국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은 참 경이롭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랴된 목재 바퀴 유물

그러고 보니 류블랴나엔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 바퀴 유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2년에 류블랴나 습지에서 발굴됐는데 측정해보니 대략 5200년 전 것으로 추정됐다. 그 당시 인류가 목재의 특성을 이용해 바퀴를 만들 줄 알았고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거라 흥미로운 유물이다. 시립박물관에 있다. 모든 혁신은 결국 누군가의 상상으로부터 시작하나 보다.

열람실로 가는 통로

참고로 혹시 이 도시를 방문한다면 국립+대학 도서관 방문도 추천드린다. 어두운 색의 대리석을 지나 밝은 색의 대리석이 이어지는데, 무지의 암흑과 지식의 광명을 상징하는듯했다. 1941년에 지어진 건데 건축가 요제 플레츠니크의 작품이다.  이 요제 플레츠니크란 사람 역시 대단한데, 이 사람이 지금의 류블랴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삼중교, 부처스교, 코블러스교, 크리잔케 야외극장, 야외 시장 건물 등등. 류블랴나에선 걷다 보면 만나는 아름다운 것들이 그의 작품이다.


걷다 보니 더 보이고 즐기게 되는 도시, 류블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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