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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Aug 07. 2021

새끼돼지 요리와 스페인 유대인

중세 유대인 배척과 제국의 몰락

세고비아 로마 수도교

수도교로 유명한 스페인 세고비아를 찾는 분들은 새끼돼지 요리를 기억할 것이다. 접시로 자를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는 요리다.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아 많은 분들이 찾곤 한다. 이 요리는 스페인 국민 요리이기도 한데, 스페인어로 꼬치니요 아사도 Cochinillo Asado라고 부른다.

@Restaurante Jose Maria at Segovia

그런데 이 요리, 유대인 개종의 감별로 쓰인 무시무시한 요리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개종한 유대인을 콘베르소Converso 라고 한다. 이들한테 돼지고기를 먹어서 개종을 증명하라고 한 것이다. 17세기 일본의 '십자가 밟기'를 떠올리게 된다. 에도 막부 시절, 막부는 금교령을 선포하고선 기독교 신자를 가려낸다며 ‘십자가 밟기’를 강요했다. 예수의 성화나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라고 했고 그렇게 못하는 이들은 기독교 신자라고 처형하고 박해했다. 참 무지막지한 시대를 헤쳐왔구나 싶다. 게다가 개종을 증명하라고 하는 이유는 증명하지 못하면 그 콘베르소의 재산을 모두 빼앗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의 광풍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미뤄 짐작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중세 스페인의 유대인은 기구한 시대를 살았다. 처음엔 그나마 유럽에서 유대인이 환대받았던 곳이 스페인이다. 그 중심에 있던 도시가 마드리드 근교의 톨레도다. 톨레도에는 지금도 성당과 유대인 회당,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한다.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왕이라고 스페인 전성기를 이끈 왕이 있는데 그는 유대인이나 이슬람들을 환대했다. 덕분에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이 톨레도로 모여들었고 스페인의 문화적 전성기에 기여했다. 이슬람의 동화나 과학서적이 나오고 코란도 번역 출간된 때가 이 시기다. 중세 시대 금서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도 소개됐다. 문화적 사상적 용광로였던 셈이다. 이 시기를 콘비벤시아 convivencia, 즉 공존의 시기로 부르는데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상징이 알폰소 10세의 묘비다. 라틴어와 함께 아랍어와 히브리어가 쓰여있다.

톨레도 전경

이랬던 스페인이 변한 시점은 1492년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3월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진다.  

'레콩키스타'라고 이슬람 왕국에 대한 투쟁을 통해 기독교 왕국이 완전 승리를 선언하자마자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진 셈이다. 알함브라 칙령이라 불렸다. 내용을 보면 유대인은 모두 떠나되 재산을 가지고 나갈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한다.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돼 있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단서조항을 보면 '금과 은, 화폐의 반출을 비롯해 국가가 정하는 품목을 금지한다'라고 했다. 사실상 재산 반출을 불허한다는 얘기다. 빈털터리로 떠나란 얘기다. 망명을 선택한 유대인들의 행선지 중엔 북아프리카 이슬람 국가로 떠난 경우도 있었다.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

그래서 지금도 모로코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있다. 페즈, 마라케시 등 모로코 주요 도시엔 ‘멜라’라고 불리는 유대인 게토가 형성돼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다음이 포르투갈이었다. 하지만 마누엘 1세(Manuel 1 재위:1495~1521)가 스페인 공주와 정략결혼하면서 스페인은 유대인 추방령을 요구했다. 결국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로 향하게 된다. 포르투갈에서 개종한 이들, 또는 개종한 척했던 이들은 1506년 부활절 때 7000명이 학살되는 비극의 희생자가 된다. 호시우(Rossio) 광장 한편에 2006년에서야 추모비가 만들어졌다.


"1506년 4월 19일, 이 광장에서 시작된, 편협함과 종교적 광신으로 벌어진 대학살에서 살해된 수천 명의 유대인 희생자를 기리며" (호시우 광장 추모비 문구)

포르투갈 리스본 호시우 광장

그럼 덕분에 스페인이 번성했을까? 경제학의 상식으로 생각해봐도 일시에 집을 팔아대고 금을 판다면 어떻게 될까? 심지어 그때는 신대륙에서 은이 반입되던 때다. 물가가 올랐다. 인플레이션이 생긴 것이다. 당연히 먹고 살기 팍팍해졌다.


게다가 중세 시대 귀족들이 꺼리던 많은 일들은 유대인들이 하던 일이었다. 대부업을 하면서 금융업을 겸하던 이들이 유대인이다. 그리고 담보로 보석을 받았기에 세공 일도 함께 했다. 유대인이 있는 곳에 다이아몬드 시장이 형성되는 이유다. 이런 전문직 유대인들의 추방은 경제적 타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세고비아 성당

게다가 스페인은 종교재판과 이단 심판에 광분했다. 몰래 유대교를 믿는다고 발렌시아에선 1000여 명을 학살했다. 세비아에선 4000명을 말뚝에 묶은 채 화형을 시켰다. 이들의 행보는 나중에 '혈통'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17세기 스페인에서 정부 관료나 대학 교수가 되려면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해야 했다. 증조할아버지가 유대인이면 안된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길까? 종교재판이 중세의 전성기인 10세기 초반대가 아니라 중세의 끝물에 진행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1480년부터 1530년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이유로 개최돼 2000여 회의 처형이 이뤄졌다. 3세기 동안이나 계속된 종교재판 제도는 1834년에야 완전히 철폐되었다. 스페인 종교재판소가 존속하는 동안 약 34만 명의 희생자가 생겨났다" 홍익희 <유대인 경제사> 4권 p35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대인들과 공존하던 때 강력한 제국을 구축했던 스페인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대신 유대인을 포용했던 네덜란드가 제국으로 발돋움한다.

세고비아 성당

관용을 통해 제국을 건설하거나 중흥기를 마련했던 나라들이 이교도나 이민족을 배척하며 쇠락하는 역사는 놀랍게도 프랑스 절대왕정 등 박해의 대상이나 이유, 형식이 다를 뿐 본질에서는 같은 이야기로 반복된다.

암스테르담

"이 번영의 나라에는 귀족이 없으며 어떤 계급과 종교를 갖고 있어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


아버지가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던 철학자 스피노자가 네덜란드에 바친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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