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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Aug 07. 2021

기어코 박물관을 모스크로 바꾼 터키

소피아 성당과 코라 교회

@Mahir Polat(2020년 10월) 왼쪽은 예전 사진, 오른쪽은 모스크 전환 이후의 사진이다. 같은 공간이란 게 믿기는지

사진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트위터에서 본 터키 이스탄불의 키리에 박물관(코라 성당)의 2020년 전과 후 사진이다. 작년  에르도안 대통령이 성 소피아 성당과 키리에 박물관을 모스크로 바꾼다고 하더니 기어코 이렇게 만들었구나 싶다. 참 화 나는 상황이다.

성 소피아 성당. 참 기구한 운명의 성당이다. Hagia Sophia는 터키어로 아야 소피아라고 읽고 그리스어로 하기야 소피아라 읽는데 '성스러운 지혜'란 뜻이다. 537년에 성당으로 만들어졌고,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모스크가 됐다. 물론 중간에 십자군 원정 때.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그렇게 훼손되고 모스크로 바뀌면서 모자이크들에 회 덧칠까지 행해졌다. 이걸 수십 년 동안 복원한 게 최근의 모습이었다.

출구 쪽으로 나오다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모자이크

출구 쪽으로 나오다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모자이크, 왼편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 537년 성 소피아 성당을 짓도록 명령한 사람이고, 오른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고 기독교를 국교화한 인물이다. 각각 들고 있는 건 성소피아 성당과 이스탄불 성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출구 쪽이라 이 모자이크는 천으로 가리지 않았다.

아타 튀르크 이후 터키공화국이 들어서면서 1934년, 전 인류의 유산이란 의미로 특별법까지 만들면서 이곳은 박물관이 됐다. 그랬는데 다시 모스크로 바뀐 것이다.


"나의 조국을 6세기 전으로 되돌렸다 아야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다시 바꾸는 것은 터키가 더는 세속국가가 아니라고 세상에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나 같은 세속적인 터키인 수백만 명이 이에 반대하며 울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BBC 인터뷰 내용이다. 울분이 전해진다.

에르도안은 2020년 7월 24일을 모스크 전환의 날로 삼고 예배를 대대적으로 강행했다. 참 공교롭다 싶다. 오스만 대제국의 영화를 간직한 터키, 그 600년 영화가 깨진 게 1차 세계대전 때다. 패전국이 됐고 그리스 등 외국 세력이 터키 땅으로 들어와 점령했다. 이때 독립전쟁을 벌인 게 아타 튀르크다. 이 전쟁의 결과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체결이 이뤄진다. 이스탄불을 포함한 동 트라키아 지역은 터키의 영토로 지키면서, 터키와 그리스 사이 바다인 에게해 섬을 그리스 영토로 인정한 협약이다. 패전을 했지만 승전국들이 줄 그어놓은 평화를 거부하고 스스로 평화를 협상한 유일한 나라로 터키로 평가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스탄불 공항 이름이 아타 튀르크 공항이듯 터키 국민들의 아타 튀르크에 대한 신뢰도는 매우 높다. 그가 꿈꿨던 터키는 세속국가였다.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 대신 근대국가, 공화국으로의 변화를 꾀한 것이다. 아타 튀르크가 성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명명한 이유였을 것이다.

2021년, 성 소피아 성당 바닥엔 푸른색 카펫이 깔렸다. 관광객은 예배 시간이 아닐 때만 입장할 수 있다. 신발은 벗고 들어가야 한다. 근처 블루모스크가 이런 방식으로 운용되는데, 여름날 카펫과 맨발이 만드는 냄새는 그리 유쾌한 추억이 아니다.

카펫 때문에 일단 바닥의 대리석은 볼 수 없다. 그리고 메카 방향에 있는 중앙부 모자이크는 천으로 덮어버렸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 옆에 원형 패널이 있고 각각 알라, 모함메드가 쓰인 걸 보면서 참 경이롭다 생각한 기억이 난다. 알라, 마리아, 예수, 모함메드가 공존하는 공간이었으니까. 이제 그 광경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던 길이 통제돼버렸다. 모자이크를 더 가까이에서 감상하며 거대한 빛의 성당을 볼 기회가 차단된 셈이다.

키리에 박물관, 코라 성당의 외관이다

키리에 박물관 상황은 더 심각해 보인다.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아름다워서 비잔틴 양식의 결정판으로 여겨져 온 곳이다. 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위로 하얀 천이 덮여버렸다. 찾아가기도 어려운 외곽지역에 있는데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확실히 더 줄어들듯싶다.


코라(Chora)는 그리스어 Khora에서 온 말이다. 교외 또는 시골이란 뜻이다. 코라 교회 건설시기는 4세기로 추정되는데 처음엔 콘스탄티누스 성벽 바깥에 존재했다. 그러다 성곽이 확장되면서 성곽 안으로 들어왔다. 그 후  무너지고 다시 짓고 했고 십자군 전쟁 때 이스탄불을 점령한 십자군에 의해 많이 파괴됐다.


코라 교회는 그 후 1316~1321년 테오도르 메토키테스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비잔틴 양식의 결정판이다. 그 후 모스크가 된 게 1511년 일이다. 미나렛이 추가됐고 지진까지 겹쳐 보수 공사도 이뤄졌다.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성경 속 이야기들인데 작은 공간이지만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이게 천으로 뒤덮인 모스크가 됐다.


천에 가려진 부분엔 신약성서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공생애의 기적, 예수의 12제자,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등이 묘사돼있다. 직관적이라 금방 이해가 간다.


"모든 나라의 운명은 문명을 건설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문명화에 성공하려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합니다. 수백 년 전의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과거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아타 튀르크의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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