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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Sep 03. 2021

리스본, 대지진이 만든 도시

1755년 리스본 대지진과 폼발

항구도시 리스본은 여타 유럽 도시와는 확연히 달랐다. 시원하게 뻗은 도로가 바둑판처럼 연결돼 있었다. 널찍한 광장도 중세 도시에서의 느낌과는 달랐다. 왜 그럴까? 그 답은 1755년의 지진에 있다.

Praça do Comércio

1755년 11월 1일 토요일 아침 9시 40분. 만성절이라 모두 즐거운 분위기였다. 축제를 즐가기 위해 시민들은 성당으로 모였다. 그때였다. 지금 추산하기로 진도 8 정도의 강진이 왔다. 건물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렸다. 40분 후엔 쓰나미가 도시를 덮쳤다. 피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은 바닷물에 휩쓸려나갔다.또 한 번 지진이 이어졌다. 쓰러진 촛불 때문에 불까지 났고 시내는 불바다로 변했다. 불은 1 주일 놈게 이어졌다. 거센 바람이 불면서 불은 더 세차게 탔다. 생지옥이었다. 다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어수라장.


아름다운 중세도시 리스본은 불과 몇 분 사이에 폐허로 변했다. 85% 정도의 도시가 파괴됐다. 파괴된 성당의 수는 대략 35에서 40개. 인구 27만의 리스본 시민 중 약 3만 명에서 7만 명이 사망했으니 재앙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추정할 수 있겠다. 궁전도 무너졌고 7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던 도서관도 사라졌다.

Santa Justa Lift

세바스티앙 카르발류 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lo란 정치인, 나중에 드 폼발 후작으로 불리는 이의 지도력이 돋보였던 순간은 그 직후였다. 망연자실한 주제 jose 1세 국왕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었을 때 ‘죽은 자는 묻고 산 사람을 돌봐야 합니다’라고 답한 인물이다. 여기서 죽은 자를 묻는다는 건 매우 중요한 얘기다. 리스본 지진 때 전염병 피해가 매우 적었다. 장례 절차를 간소화하고 시신 처리를 서둘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신은 건물 잔해를 처리하면서 함께 수장시키기도 했다.

생존자들에겐 식량을 제공했다. 그리고 약탈자를 처벌하고 사회질서 유지에 나섰다. 산 사람을 돌본 것이다. 이런 재앙이 닥치면 광신도들이 설치기 마련이다. 심판의 날이 왔다는 선동을 해댄다. 어김없이 신부들 중에 그런 설교를 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당시 예수회 수사였던 말라그리다 Gabriel Malagrida는 대지진이 인간의 타락함에 대한 ‘신의 징벌’이란 주장을 폈다. 회개와 기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폼발 총리는 이런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끝내 쫓아냈다. 중세 종교재판의 전통이 강한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에서 이제 중세가 완전히 끝났음을 웅변하는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유럽의 신교 세력 역시 리스본 대지진은 이교도와 우상 숭배, 그리고 종교재판소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고 설파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신의 응징이라면 왜 성당은 무너졌는데 리스본 홍등가는 피해를 입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볼테르는 ‘어머니 품에서 으깨져 피 흘리며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느냐’고도 물었다.

Torre de Belém

이성의 시대가 열리는 중이었다. 폼발 총리가 돋보이는 점은 ‘폼발 서베이’라고 불리는 조사를 통해 지진의 원인을 찾아보려 했다는 점이다. 과학으로 문제에 접근한 것이다. 폼발 서베이는 지진의 지속시간, 진동의 방향, 파괴 현황, 사망자 수, 해일과 균열 상황, 화재, 동물들의 행동 패턴, 정부 조치, 식량 부족 여부 등을 지역마다 꼼꼼하게 기록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근대 지진학의 원조 정도가 탄생한 순간이 이때가 아닐까 싶다.  폼발은 확실히 계몽주의의 수혜자였다.

지진이 발생한 날, 왕의 두 번째 물음은 이제 수도는 어디로 할 거냐는 거였다. 파괴된 리스본을 떠나고 싶은 속내였다. 이에 대해 폼발은 수도는 리스본이라고 확고하게 얘기했다. 그렇다고 단순한 과거 도시의 복원을 바라지도 않았다. 지진 피해 앞에 그가 그린 도시는 완전히 새로운 도시였다. 어차피 모든 게 무너진 지금이 새로운 도시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봤다. 격자형으로 도로를 만들었다. 도로변 집의 높이를 5층 이하로만 지을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제했다. 한쪽 편 집이 무너지더라도 반대편 집엔 영향을 주지 않도록 도로 넓이도 확 넓혔다. 사유재산권을 주장하는 귀족들의 저항 역시 극복해야했다. 리베르다드 대로가 이때 만들어졌다. 리베르다드 대로는 ‘포르투갈의 샹젤리제’라고 불리는데 고급 쇼핑센터, 호텔, 뮤직홀, 영화관 카페가 들어선 곳이다.


도시 설계 때 지진의 영향을 측정하기 위해 건물을 지으면서 군대를 동원해 한꺼번에 걷게도 해봤다. 진동을 견디는지 나름의 실험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내진 시설에 대한 고민의 결과 gaiola pombalina란 나무로 만든 격자형 내진설계를 만들고 의무화했다. 지진에 석조 건물이 충격 흡수 면에서 취약한 걸 보완하려고 나무를 활용한 것이다. 겉보기엔 그냥 석조 건물이지만 내부에 3차원으로 나무 격자를 활용하도록 했다. 나무가 지진의 충격파 흡수엔 유리하지만 화재엔 취약한 점 때문에 외부는 석조로 쌌다. 두 기법의 장점을 딴 거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 얼마 전까지 종교재판의 광풍이 불던 시대란 게 믿어지지 않는 실험들이다.

언덕 위에 공터를 둬야 한다는 생각도 이때 퍼졌다. 지진이나 쓰나미가 몰려올 때 대피 공간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지금도 리스본 시내를 다니다 보면 그의 이름을 딴 광장들이나 도로, 동상을 자주 보게 된다. 모두 후세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막대한 지진 피해를 입었던 곳 리베르다드 도로의 끝자락쯤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한 시대는 때로 한 사람과 함께 열리기도 한다. 포르투갈의 근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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