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덕에 받은 급행 결혼 비자

제가 왜 국제결혼을 해야 했을까요?

by Kevin Haim Lee

*아브너 가족을 처음 만난 날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저는 2000년 9월 이스라엘의 큰 명절인 '로쉬하샤나' 명절에 아브너의 큰 형님 집에 초대를 받았어요. 아브너 가족들을 처음 소개받은 날이었죠. 아브너와 동거를 시작하고 3주쯤 되었을 때였어요. 이때 아브너 큰형과, 아브너의 나이 차가 무려 30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브너는 13형제 중에 뒤늦게 태어난 늦둥이 막내였어요. 이 모임에는 큰 형의 자녀들과 손주들, 그리고 사촌들까지 20명이 모인 대가족 저녁 식사 자리였어요. 큰형 가족만 20명이니, 나머지 11명의 형제 가족까지 합치면 200명이 되겠죠?


다닥다닥 모여서 식사를 하던 그분들은 저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그분들은 영어를 못했고, 저는 히브리어를 몰랐던 때였어요. 저는 불편함에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샤부작 샤부작 끊임없이 나오는 낯선 이스라엘 명절 음식을 먹어야 했어요.


모로코 출신의 큰 형수가 만든 음식들은 희한한 색깔과 맛 그리고 냄새로, 맛을 볼 때마다, 제 혀를 꼬집는 것 같았어요. 뱉어낼 수도 없고... 꾹꾹 참으면서..."아! 맛있어요!"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지요. 저는 입이 아주 짧았던 사람이라 아무 음식이나 잘 안 먹는 사람이었지만, 제 입만 쳐다보고 있는 형수 때문에 별 수 없이 제 앞에 놓은 음식들을 다 먹어봐야 했어요.


아브너 형님 집은 이스라엘 아쉬켈론이었습니다. 여기는 도시가 아니라 남쪽 시골이라고 보시면 돼요. 이곳에 사시는 시골분들은 좀 더 순진하시고, 구식이세요.


1. "넌 누구니?" -

'케븐'이라고 하면, 한 번에 이름을 못 알아들으셨어요. 꼭 다시 "뭐라고?"

2. "어느 나라에서 왔니?"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표정들이 다 묘해졌어요.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눈치예요.

3. "돈 벌러 왔니?"

이곳 시골분들에게 동양인은 그저 돈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쯤으로만 보이는 것 같아요.


*억척스러운 형수님:

거실 바닥에서 날 밤을 새운 날"


장장 4시간의 저녁 식사가 끝나고 탈출을 하려는 순간에, 제 계획에는 절대 없었던 비극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아브너의 형수가 저희한테 자고 가라고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말이 안 통하는 그분한테 "아니요. 가겠습니다"라고 거절할 재간이 없었어요. 아브너에게 '그냥 가자'라고 좋게 속삭였어요. 다들 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찡그린 얼굴을 할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큰 형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어찌나 억척스럽게 말을 하시는지 대충 눈치로 상황 판단이 되더라고요. 아브너는 결국 형수의 기세에 눌려서 '그냥 자고 가자'라고 했어요.


"텔아비브에 돌아가면 우린 바로 쫑이댜!" 전 너무 어색하고 황당해서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머리가 돌 지경이 되더라고요. 형수랑 서로 뭔가 대화가 되어야 제가 직접 거절을 하지요. 'No'만 알아 드시는 분한테, 못 자고 간다고 어떻게 설명을 하겠어요? 결국 형님 집 거실 바닥에서 쿠션 하나, 홑이불 한 장 덮고 그날 밤을 새웠지요.


*운명의 분홍 물고기와 현실적인 프러포즈


2000년 9월부터 아브너와 동거를 시작하고, 영국 영어 아카데미 대신에 이스라엘 히브리어 울판을 다니면서 히브리어를 배우게 되었어요.


같이 살면서도 저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브너도 결혼할 마음으로 저와 동거를 시작하지 않은 것 같았고요. 서로 살아보다 안되면 그냥 미련 없이 아브너 집을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죠. 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2001년 4월의 어느 날, 기묘한 꿈을 제가 꾸었어요. "깊은 산속에 병풍 같은 폭포가 쏟아 내리고 있는데, 그 폭포를 거슬러 기운차게 올라가는 아름다운 분홍빛의 커다란 물고기"가 나오는 태몽이었어요. 전 당연히 제가 알고 있는 한국언니 태몽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이게 제 태몽일 줄이야(헉!).


낳느냐? 낳지 않느냐? 서울 가족들에게 뭐라고 하나? 친구들한테는 모라고 하지? 멘붕이 오더라고요. 저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비혼주의를 호언장담하던 제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저도 황당했어요.


여하튼 저는 혼자 고민 끝에 이스라엘에서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을 내렸어요. 아브너는 제가 한 결정을 무조건 따른다고 했어요. 이때 저는 33살, 아브너는 50살이었어요. 둘 다 결혼에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임신을 하고 난 뒤에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아이를 출산해도, 결혼이라는 관례에 얽히고 싶지 않다고 아브너에게 말했어요. 파트너로서 아이를 같이 키우자고 했지요. 물론 아브너는 제 의견에 동의를 했죠.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고 했어요. 이 당시에는 이렇게 말을 했어요.(나중에 딴 소리를 했지만...)


그러나 문제는 현실이었어요.

4주 정도 간격으로 산부인과를 가게 되었는데, 제가 외국인이라 의료보험이 안 되다 보니까 비용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한 번 갈 때마다 500불 정도 내는 것 같더라고요. 출산을 하게 되면 상황에 따라 수천, 수만 불이 들 수도 있다고 하고... 제 돈은 아니지만 점 점 부담이 생기더군요. 이때 아브너가 아주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왔습니다.


"결혼해서 결혼 비자를 받자. 그러면 이스라엘 의료보험이 돼!"

이게 바로 아브너가 저에게 한 프러포즈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의료보험"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을 하기로 했어요.


저는 정말 순진하게 형식적으로 결혼하는 척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 등파진 원피스와 의료보험 위장 결혼식(내 입장에서)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의료보험*을 위한 위장 결혼식(?)을 했어요. 그것도 동네에 있었던 이스라엘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20분 만에 쌩하니 치렀어요. 저희가 한국 대사관에서 결혼을 한 두 번째 커플이라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웨딩드레스도 없었고 부캐도 없었어요. 그나마 영국에서 사놓았던 코랄빛의 타이트한 등파진 원피스가 있어서, 전 이 원피스를 입었지요. 임신 3개월째라 배가 별로 안 나와서, 이 원피스를 입을 수 있었어요. 이때 한번 입고 나서, 전 다시 이 원피스를 입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 뒤로 제 몸이 이 원피스에 들어가지를 않았어요. 이 때 찍어 놓은 사진이 있었는데, 언젠가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화김에 버려서 지금은 없어졌어요.


8월 여름 시즌이라 아브너는 아침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을 할 때였지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브너는 오전 근무를 하고, 대사관 예약 시간이었던 오후에 잠깐 나와서 결혼식을 하고 다시 해변으로 일을 하러 나갔어요. 저희가 돌았다고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이스라엘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는 것처럼 '결혼 증명서' 받으러 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잠깐 서류받으러 가는 건데,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는데, 순진한 바보였던 거죠.


세상에 위장 결혼이 어디 있어요? 애 낳고 같이 살면, 그게 부부지... 누가 의료보험 때문에 결혼식만 했다고, 우리는 부부가 아니다는 말을 믿겠어요. 저만 한심한 철부지가 되는 거죠.


* 위장 결혼 비자 발급 절차


한국 대사관 직원은 한국 대사관에서 발행한 "결혼 증명서"가 이스라엘 비자국에서 인정해 줄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어요. 발행을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스라엘 결혼 비자를 받은 사람이 아직 없다고 했어요.


이때 제가 준비해야 했던 서류들을 적어볼게요.

제 여권, 제 출생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범죄경력증명서, 결혼사진, 지인 추천서, 공동 은행 계좌, 같이 살고 있다고 증명하는 이웃 추천서...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서류 외에도 비장의 무기가 따로 있었어요. 이 서류가 있었기에 고속으로 비자 발급이 진행되었죠.


바로 산부인과 진단서와 초음파 사진


저희는 내무부 비자 담당자와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담당 직원은 아브너가 미리 알아보고 찾아낸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사촌"이었어요. 이스라엘은 어느 곳에서든 네트워크가 제일 중요해요. 이미 저희 상황을 알고 있던 담당 직원은 아무 의심(?)도 없이 저희가 준비한 서류를 '긴급처리'신청으로 분류해 주었어요. 이렇게 하면 좀 더 일찍 비자가 나오겠지만, 그래도 몇 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알려주었어요.


원래 이스라엘 내무부의 비자 업무 처리 시간은 느리기로 정평이 나 있었어요. 서류 심사를 까다롭게 하다 보니, 아무도 언제 서류가 통과되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히든 카드: 이스라엘 국회의원의 팩스


아브너는 실용적인 사람이에요. 제가 이스라엘에서 빨리 의료보험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곳저곳 확인을 하고 다닌 거 같아요.


어느 날 갑자기 깔끔한 옷을 입고 자기를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 때, 그의 스쿠터에 매달려서 찾아간 곳은 현직 국회의원의 사무실이었어요.


이 국회의원은 매일 바다에 산보를 다니셨고, 그러다가 오며 가며, 아브너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대요.


국회의원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하고, 아브너는 상황을 설명했어요.

이 분은 가만히 저희 스토리를 들으시고, A4용지에 바로 글을 쓰셨어요. 추천서 비슷한 건데, 자기가 보증을 할 수 있는 실제 부부이고, 임신을 한 상태니 서류 검토를 신속히 해 달라는 부탁의 편지였어요.


비서에게 이 편지를 팩스로 예루살렘 내무부에 보내게 하셨어요.


* 1개월 만에 받게 된 결혼비자


살다 보니 이스라엘 관공서는 서비스가 아주 엉망이에요. 대부분의 비자국의 직원들은 불친절해요(저의 경우). 그래도 참고 버텨야 합니다. 제가 대놓고 불평을 하면 저만 손해니까요.


기적적으로 저의 결혼 비자는 1달 만에 발급이 되었습니다. 워크 비자를 건너 띄고, 요청한 대로 결혼 비자가 나와서 이스라엘 의료보험에 바로 등록할 수 있었어요.


의료 보험이 해결되고 나자, 목구멍에 걸렸던 가시가 내려간 것처럼 속이 시원했어요.


하지만 저는 꼭 아브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습니다.


"아브너, 이제부터 나를 너의 아내라고 부르지 말아 좋으면 좋겠어. 우리는 실제로 부부가 아니잖아."


아브너의 눈이 흔들리더군요.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어요.


다음 글은 아브너와 살면서 겪었던 문화 쇼크에 관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