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판 우물에 내가 빠진 날

360도 뒤집힌 인생, 그 시작은 전화 한 통

by Kevin Haim Lee

나는 아브너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1주일을 고민하였다.

이스라엘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나 있었고,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북쪽에 있는 키부츠 몇 군데를, 자원봉사를 할 계획으로 돌아다녀 보았다. 새벽 5시부터 오전 12시까지 바나나를 따는 게 일이라는, 얼굴이 새카맣게 타 버린, 한국 대학생들을 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 나왔다. 이미 31살이 되어버린 내가 뛰어들 인간 체험의 현장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은 한국언니랑 이스라엘 형부, 심심해서 무료함이 극에 달했다. 뭔가 새로운 이벤트가 내게 필요했다. 바로 이때, 나에게 이 남자의 전화번호가 보였다. 아직 이 번호가 살아 있는 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 사람의 첫인상이 너무 편하고, 착해 보였었다. 절대로 이 사람과 연애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40대로 보였던 이 사람은 결혼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전화를 하라고 했으니까, 편하게 한번 더 만나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고 내 머릿속에 주문을 계속 걸었다. We are the world 아닌가? 친구는 다다익선 아닌가? 낯선 땅에서 현지인 친구 하나쯤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계산이 섰다. 여자를 납치하여 새우배에 태우는 나라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혼을 목적으로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남자와 길게 만나게 되면, '결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라고 미리 못을 박아두곤 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어쭙잖게) 비혼주의자였다.


내가 이 사람에게 전화를 하게 된 이유는 로맨틱한 기대보다는, 지루했던 이스라엘 살기가 한 달이 끝나고, 앞으로 두 달을 더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야겠다는 장난기 섞인 호기심에 가까웠다. 이때만 해도 나는 이 사람을 절대로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캐주얼한 만남, 부담 없는 만남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에라, 모르겠다. 연락이나 한번 해 보자! 없으면 잊어버리면 그만이지.'

최종 결정을 내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이렇게 우리의 두 번째 운명이 시작된다.

이 두 번째 운명은 전적으로 내가 시작한 역사다. 내가 건 이 한통의 전화가 내 인생과 그의 인생을 360도 뒤집어 놓았다. 결혼을 하고, 이 사람과 살게 되면서 현실로 부딪히는 문화 차이와 갈등으로 대판 부부싸움을 하게 될 때면, 나는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전적으로 판 우물에 내가 빠졌기 때문이다.


"헬로! 아브너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아브너는 해상 구조 요원 초소에서 일을 할 때는 전화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해상요원들은 아침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을 해야 하는 여름이 되면, 근무를 하다가 교대로 스테이션 안에 있는 작은 방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곤 했다.


내가 전화했을 때, 아브너는 이 방에서 30분의 낮잠 휴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내가 전화를 했을 때, 내 전화를 받은 사람이, 운 좋게도 아브너의 베스트 프랜드였다.


"네가 찾는 사람이 아브너 하임이니?"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의 친구는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지금 아브너는 다른 해변에서 일을 하고 있고, 아브너가 휴식 중이라 통화를 할 수 없으니, 아브너가 나에게 전화를 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잠깐 망설였다가, 내가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연락처를 남기지 않는 나의 고약한 의심병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는 아브너가 일하고 있는 해변의 전화번호를 내게 알려 주었다.


한국에서부터, 내 연락처는 어지간히 친한 사람이 아니면, 특히 남자에게는, 난 절대로 잘 알려주지 않는다.


이십 대 초반에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그 남자가, 술만 먹으면, 시도 때도 없이 밤에 전화를 걸어서. 술 주정을 했다... 핸드폰이 없을 때였다. 오밤중에 울리는 집 전화 소리에 온 가족이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결국 밤이 되면 전화기 코드를 뽑아 놓고 잤다. 그때의 전화 트라우마가 지금도 내게 남아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나의 연락처는 없었다. 더욱이 같이 지내고 있는 한국 언니집의 전화번호를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이 엉뚱한 만남을 언니에게 얘기를 하면, 틀림없이 언니가 길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왜 만나려고 하느냐며 뜯어말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언니에게 얘기하면 나는 다시 미친놈이 되는 거였다.


그나마 한 번 다녀왔던 곳이라 편안했던 텔아비브 해변을 1시간 정도 거닐었다. 야외 피자 가게에서, 피자 한쪽을 먹고, 다시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첫 번째 전화가 연락이 안 된 것이, '다시 전화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또다시, 덩그러니 혼자서 해변을 거닐다가, "에라, 모르겠다. 저지르고 보자! 여기까지 다시 왔는데,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베어 보자"로 마음을 결정했다.


공중 전화기를 찾아서 친구가 전해준 번호로 전화를 했고, 이번에는 아브너와 전화 연결이 되었다.

낯선 목소리의 남자가 "내가 아브너야!" 하자, 순간적으로 멘붕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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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까칠합니다. 세상에서 나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중년의 반이 넘어갔습니다. 조울증을 치료하면서 세상을 다시 보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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