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철없는 한국 아내

나는 아내가 될 마음이 1도 없었다.

by Kevin Haim Lee

저는 아내가 될 마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엄마가 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지요.


34세, 낯선 이국땅 이스라엘에서, 덜컥 임신을 하게 되면서 제 인생은 꼬이기도 하고, 풀리기도 했습니다. 피임을 소홀히 한 저와 아브너의 공동책임이었죠. 아무 연고도 없는 나라에서 아이를 지울 용기는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 결정에 따라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아브너의 말에 이끌려 결국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내라고 부르지 마!" 거슬렸던 호칭


위장결혼을 하기 전까지, 아브너는 친구들에게 저를 '케븐'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한국여자 케븐. 그러면 소개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결혼(위장 결혼?)을 하고 난 후에 가끔씩 저를 '내 아내'라고 소개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호칭이 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여자 친구라고 하면, 좀 덜 놀랄 것 같은데, 굳이 아내라는 소리를 할 때마다 자꾸 제 귀에 거슬렸어요. 내가 아내라고... 당신의 아내... 가짜 아내도, 아내는 아내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남들한테 저를 소개할 때 '내 아내' 대신에 사용할 대안도 없더라고요. '내 아이 엄마(대리모?)' 아니면 '애 때문에 결혼식만 한 한국여자(TMI)'라고 소개할 순 없으니까요. 국회의원 앞에서 결혼을 한 사이라고 했으니, 대외적으로 우리는 아내와 남편이 된 거였지요. 저만 사실이 아니라고 억울해 보아야 소용이 없었어요.

수평적인 나라, 이스라엘식 부부 싸움


'아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반감이 생겼지만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내, 집사람, 안 사람이라는 말이 싫었던 이유는 여자를 낮추는 듯한 뉘앙스 때문이었습니다. 무언가 저를 압박하고 갇아 놓으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들려서 싫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저희는 부부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법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이 '아내' 소리가 듣기 싫어서 위장결혼을 했다고 사실대로 실토를 하면, 저의 결혼비자는 연장이 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의료보험도 꽝이 되어버리고... 아내 소리를 참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이스라엘은 나이 불문 이름을 부르는 수평적인 나라였습니다.

"케븐, 너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브너, 너 가서 귤 좀 가지고 와, 먹고 싶어."


저는 이런 존대가 없는 생활들이 남자와 여자, 아내와 남편을 수직 관계과 아닌 수평 관계로 유지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여자라서 아니면 아내라서 그리고 나이가 너무 어려서 기가 죽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아내가 되어야 한다면 순종적인 현모양처가 아닌 당당한 아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존대가 필요 없는 생활 방식이 저를 더 대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저를 소크라테스 아내 같은 악처가 되었습니다.


저는 부부싸움도 수평적으로, 부지런히 싸웠습니다.


저는 화가 나면 입을 닫아 버립니다. 험상굳은 얼굴을 하고 상대방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저의 주특기입니다.


아브너는 저의 이런 행동 때문에 깊은 탄식을 했습니다. 제발 대화를 하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게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빌었습니다. 태어나서 나같이 고집불통인 사람은 처음 만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같이 살면서 겪게 되는 나이차이와 문화차이는 우리나라 38선보다 더 팽팽했습니다.


저는 아브너에게 화가 나면 적어도 이틀은 '아우성 없는 전쟁터'를 맛보게 합니다.


2-3일 동안 아브너를 아는 척도 안 하다가, 혼자서 화가 가라앉고 나서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화가 났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아브너. 내가 그제 바다에서 집에 가자고 했는데, 너는 계속 내 말을 무시하고 친구랑 얘기를 했잖아! 내가 힘들어서 가자고 하면 바로 일어나서 가야지. 내가 임신해서 힘든 거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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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까칠합니다. 세상에서 나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중년의 반이 넘어갔습니다. 조울증을 치료하면서 세상을 다시 보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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