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의 나는 모스크바를 살았다
러시아의 심장 크렘린의 붉은 광장에서 나는 끝없이 내리는 눈을 맞았고 길 건너 볼쇼이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를 보았다. 눈 녹는 모스크바의 강가에서 보드카가 얼마나 독하고 지독하게 좋은 술인지를 맛보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았던 그때의 서른에 나는 레닌 언덕에 도도히 서 있는 모스크바 대학교 옆의 서커스 극장을 줄기차게 다녔다. 그 입장권은 요즘의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값에도 못 미쳤다. 함께 살던 하숙집의 아저씨는 내가 곧 서커스단의 배우가 될 수도 있겠다고 나를 놀렸다.
소설 '아르바트의 아이들'을 쓴 작가 아나똘리 리바꼬프가 살았던 그 아르바트의 골목에 서 있는 낡은 아파트에서 나는 살았다. 그 아르바트 거리의 한쪽 구석에는 저항가요를 부르다 요절한 빅토르 초이를 추모하는 벽이 있었다.
나는 소련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던 그 혼란하고 어두운 시절을 그 아름다운 모스크바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살았다. 함께 그 시절을 아파하며 비관하며 그러지만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던 모스코비치 라 불리는 모스크바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며 그 시절을 함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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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연, 첫 사람 신 룰라 그레고리 예비치
아르바뜨에 있는 방 4칸의 아파트인데 주인이 고려인이라 했다. 아르바뜨는 모스크바의 중심 중의 중심이다.
걸어서 크렘린이나 붉은 광장을 갈 수 있고 세계 최대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레닌 도서관도 바로 옆이다. 모스크바에 고려인이 오천여명 산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는 데 그들 중의 한 부부인 그들이 그 아르바트에서 살고 있었다. 주인 내외가 사는 그 아파트는 방이 네 개가 있었다. 그중 방 두 칸을 내가 쓰기로 하고 한 달에 50불을 주기로 계약을 했다.
그때 그 아르바트의 집주인이 고려인 신 룰랴 그리고리예비치였다. 모스크바의 어느 공대의 실습 교수로 일하고 있는 오십 대 후반의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사십 대 초반의 주택 관리 기관에서 일하는 말수가 적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우리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어가 그들의 모국어였기 때문이었을 까. 내가 그 집에 살았던 2년여 동안 그들은 완벽에 가깝게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나 역시 그들 덕분에 생활에 필요한 러시아어를 별 어려움 없이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룰랴 그리고리예비치는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는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이 점차 식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집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들에겐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룰랴 그리고리예비치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을 하고 재혼을 했는데 지금의 부인은 먼젓번 아내의 질녀(姪女)였다. 그러니까 그에게 그녀는 처조카였던 셈이다. 전에 그는 알마아타에서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살았었는데 모스크바에 일하러 왔다가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인 처형(妻兄)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은 결혼하게 되었고 그에게는 처형(妻兄)이었던 사람이 장모(丈母)가 되었다. 물어보지 않았어도 그들과 그들 주위의 사람들이 그 일로 인해 얼마나 심한 홍역을 치렀으며 상처 또한 얼마나 깊었겠는 가를 짐작할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 가정엔 오가는 손님이 없는 듯했다.
내가 그 집으로 이사를 간 후, 며칠 후에 다가온 5월의 노동절 휴일엔 그들의 친지 몇 사람이 한국에서 온 나를 보러 온다는 구실로 찾아와 함께 저녁을 들고 보드카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난 그들의 요청으로 우리 민요인 아리랑과 도라지를 불렀다. 나의 아르바뜨에서의 생활이 점점 안정이 되고 그들에게도 생활에 활력이 되었던 것 같다.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많은 대화들을 나누었다. 아침엔 룰랴 그리고리예비치와 함께 조깅도 하고 겨울엔 가까이 있는 모스크바 야외수영장에 눈을 맞으며 함께 수영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의 좋은 친구가 되었고 또 선교사역을 위해 분투하는 나를 위해 꼭 필요한 협력자가 되어 주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좋은 협력자가 되었다. 교회당 장소 임대를 위해 물색하러 다니기도 했고 전도지를 인쇄소에 맡기기도, 현수막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결혼한 그의 아들이 기차로 삼일 거리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에 사는 아들에게 부탁해서 내 자동차를 모스크바보다 가격이 싼 그곳에서 사서 컨테이너로 부쳐오기도 했다. 물론 내가 방세 외에 그의 노력에 얼마만큼의 사례는 했지만 나의 일이면 그는 무엇이든지 힘을 다해 일했다. 때로 그와 함께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그의 형의 소유인 별장에 가서 쉬기도 했고 숲 속에서 샤 쉴릭(양꼬치)을 해 먹기도 했다. 그는 그의 아내와는 달리 말이 많았고 곧잘 흥분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도 자주 했지만 난 그러는 그가 편하고 싫지 않았다. 때로 우리가 함께 사는 집으로 유학생들이 나를 찾아올 때도 그는 반갑게 맞아 주었고 유학생들은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 줄 모를 지경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대학의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만 일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우린 함께 놀라운 일을 맞았다. 집 옆 길가에 세워둔 그의 차가 도난을 당한 것이다. 나의 차와 앞뒤로 나란히 세워 두었는데 그의 차만 없어진 것이다. 그는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아우와 친구였는데 그 덕분에 지금 사는 그의 아파트와 자동차를 오래전에 브레즈네프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했다. 십 년도 넘게 탄 그의 중형 승용차는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었는데 그것이 밤새 없어진 것이었다. 내 차는 소형 승용차지만 새것에 가까운 것인 데 왜 나란히 세워둔 그의 차가 없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를 불러 함께 기도했다. 나는 자동차를 가져간 사람을 지켜주시고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내가 드린 기도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내가 그 자동차를 다시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은 것은 기도해도 못 찾으면 그의 약한 믿음에 손상이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에게 오죽했으면 그 사람이 남의 것을 가져갔겠냐고, 차라리 잃어버릴 것이 있는 우리가 낫지 않느냐고 위로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끝까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다시 자동차를 찾는 것은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자기 방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차를 마시러 나가니 그가 먼저 나와 담배를 피우며 있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동차가 있을 것 같아 몇 번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고 한숨 쉬며 나를 보며 말했다. 그것이 자동차이기 전에 자기에겐 자식과 같았다고 넋두리했다. 그럴 때마다 함께 기도드리자며 내가 소리 내어 함께 기도했지만 그는 눈도 감지 않았고 기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곧 병이라도 나서 더러 누울 사람 같았다. 그런 그를 위해 늘 기도했다. 그러는 그에게 교회 일을 부탁하는 것도 민망했다. 차라리 내 차를 가지고 가지 않은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을 원망하기도 했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 될지를 몰랐다. 단지 차를 잃어 실망한 그를 붙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시간이 갈수록 안정을 찾아갔다. 더욱이 그는 내 차 대신 자신의 차를 훔쳐간 것이 다행이라며 만약 그랬더라면 더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차를 몰고 길을 가던 도중에 교통체증이 심해 서행하던 중 오른편 인도에 세워진 그의 차를 발견했다. 번호판을 확인하고 집으로 속히 돌아와 그에게 급히 어디를 좀 가자고 재촉했다. 어딜 가냐고 묻는 그에게 잃어버린 자동차를 가지러 가자고 했더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제 그 일을 잊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차나 마시자고 했다. 그러는 그를 내 차에 태우고 달리며 자동차 열쇠는 가졌느냐고 물으니 그건 항상 가지고 다닌다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잃어버린 차를 찾아 시동이 걸리지 않은 그 차를 내 차에 매달아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감사기도를 드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당신에겐 정말 하나님이 있다고, 그리고 자기는 그 차를 팔아 소형 버스를 사서 교회에 바치겠다고 했다. 물론 그 말을 난 귀담아듣지도 않았고 그 약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허술하긴 하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내가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할 때도 그는 뛰어다니며 교수들을 만나고 관계자들을 만나서 내가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학교의 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 선교사님들도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30년이나 지난 재 작년 내가 아르바트로 가서 다시 만난 그는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옛 친구를 만난 그는 아내를 향해 보드카를 가져오라고 소리친다. 여전히 착하고 조용한 그의 아내는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보내며 주방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