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로 통하는 물개, 까발스키 랩 시묘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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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로 통하는 물개 까발스키 랩 시묘노 비치
그는 그 큰 덩치에 교회에 올 때에도 항상 007 서류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부리부리한 눈에 짙은 눈썹의 그는 잘 생긴 러시아 사람이었다. 모스크바엔 ‘물개 클럽’이라고 하는 겨울 얼음 강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들의 동호회가 널리 확산되어 있는 데 그는 그 모임의 회장으로 있었다. 그래서 그가 우리 교회에 나오고부터 우리 교회 예배엔 물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그들끼리 별도로 모여 의논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때론 그들이 예배에 나아오는지, 그들의 모임에 나오는지 구분이 안 가기도 했다. 그 어떤 다른 목적이 있어 교회를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한 번은 동료 선교사님과 함께 얼음 강가에서 세례식을 했는데 그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물개 클럽’ 회원증을 주면 어떻겠냐고 그가 물어 오기도 했다.
그는 참으로 꾸준히 교회에 나왔다. 수요 예배에도 나오고 금식 수련회도 거뜬히 참석했다. 동료 선교사님들과 함께 시작한 신학교의 학생을 모집하기 위하여 어느 날 예배 후에 광고를 했다. 그런데 그가 찾아와 신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했다.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시작한 신학교이기에 자기 교회 학생들의 입학 허가는 전적으로 그 교회 담임 선교사에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학벌을 대졸로 제한했고 나이도 오십 세 이전의 사람들로 자격 기준을 두었었다. 그는 나이가 오십을 넘어 있었다. 물론 내가 받아들이고자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를 잘 알 수가 없었고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의 신학교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신학교 입학식이 있어 갔더니 신입생들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다.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다른 선교사님들은 내가 허락하여 온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두고 보기로 했다. 그가 왜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는 지를 도대체 모르겠기도 했고 또 혹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 내가 끝까지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도 그랬다. 그 후로 그는 신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강의하러 신학교에 갈 때마다 눈여겨보면 아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겨울철이라도 점심시간엔 틈을 내어 가까운 호수에 가서 얼음을 깨고 수영을 하고 돌아와 수업을 계속 받곤 했다. 그는 사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사실 건강했다. 나는 그것이 얼음물 수영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그에게 교회 일을 조금씩 맡겼으며 그는 그 일들을 잘 감당했다.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그에게 일단 맡기면 못하는 일이 없었다. 간혹 ‘이 일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맡겨 봐도 그는 여지없이 해 내고 말았다. 교회에서 몇 백 명 되는 사람들의 차를 준비할 때에도 그는 자신의 집에서 여러 개의 차 주전자를 매달고 와서 예배를 마치기 전에 다 준비를 해 놓곤 했다. 어느 한 주일을 총동원 주일로 정하고 천 명을 목표로 하여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전도지를 들고 지하철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설교도 하며 전도를 했다. 당일 날 버스 한 대가 필요하다고 해서 허락했더니 인근 부대에 가서 군인들을 백오십여 명을 몇 번식 오가며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총동원 주일날에 천명이 모여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다. 아마 그 절반은 그의 땀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해 여름 한국에서 온 단기 선교 팀의 젊은 학생들이 그를 ‘맥가이버’라고 불렀다. 그들 앞에 그는 못 하는 일이 없는 마법의 사나이였다. 우리 교회에서 곳곳에 지(支) 교회들을 설립했는데 그 개척 교회들의 준비 작업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그가 먼저 장소를 물색하여 빌리고 전도지를 뿌리고 ‘예수’ 영화를 상영하고 나면 그 후에 설립 예배를 드리게 되는 데 나는 설립 예배 때에 가서 설교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교회 개척을 위해 임대하는 장소는 거의가 무료이거나 가격이 저렴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의 지(支) 교회인 베다니 새 생명 교회, 셀라 새 생명 교회, 생수 새 생명 교회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 후 그도 ‘모스크바 연합신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단독 목회자로 독립시켜 생수 새 생명교회를 맡겼다. 그 교회는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휴양소 병원 내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곳에서도 환자들을 돌보며 맡은 일을 잘했다. 그곳 교인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그를 향한 뭔지 모를 약간의 불안과 의문이 항상 남아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고 그를 가르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늘 장성치 못한 아이를 대하는 듯 내 마음은 불안 불안했다. 그의 열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감격이나 그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닌 그의 단순한 생활 태도가 그런 것 같았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가 무슨 일이라도 잘했기 때문에 교회의 유학생들이 이사를 할 때면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기쁘게 차도 잡아오고 이삿짐도 잘 날랐다. 그런데 차를 잡는 과정에서 기사와 유학생 사이에서 운송비를 속이는 것이었다. 유학생에게 7만 루블을 받아서 기사에게 5만 루블을 주는 것이었다. 우연히 짐을 내리는 기사에게 물어보다 알게 되었다. 며칠 간격을 두고 그런 일이 한 번 더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괴로웠다. 밤에도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그를 불렀다. 그에게 이사하는 일을 돕는 과정에서 유학생들에게 얼마를 받아서 기사에겐 얼마를 주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내가 왜 그렇게 했느냐고 다시 물으니 일에는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되받아 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남긴 액수는 일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만약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용서를 빌었더라면 그렇게 가슴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당연한 일을 가지고 뭘 그러냐는 투였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무엇을 요구했었느냐고, 내가 당신에게 복음을 전해주며 돈을 받은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의 종이 가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종들은 땀 흘리고 난 뒤에도 아무런 대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건강이든, 지식이든지 간에 우린 거저 받았으니 거저 베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알아들었다고 하며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가 서로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함에서 오는 고독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것은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밖에 돌릴 수 없었다. 어쩜 미리 일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그가 그런 일을 했는지,
아님 그가 먼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수고의 대가를 챙겨주지 못했는지……. 아마 전자의 경우였을 것이다. 난 항상 신학생들이나 전도사님들을 사역자가 되기 위한 훈련의 과정에 서있는 이들로만 여겼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경우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여기의 문화를 고려하지 않았고 러시아의 경우를 도외시한 것이다. 내가 그를 나쁘게 만든 것이다. 아니 그저 그를 나쁘게 보았을 뿐이다.
이러한 일이 있었다. 그는 성경 구입과 배부의 책임도 맡았는데 성경 구입 시에 택시를 이용하거나 화물차를 이용하라고 해도 그는 항상 땀을 뻘뻘 흘리며 지하철로 몇 번이고 운반했다. 그럼으로써 교회의 재정을 아꼈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목사님 두 분이 선교지 방문차 오셨다. 교외 멀리 러시아 정교회 본산지와 정교회 신학교가 있는 ‘자고르스크’라는 곳으로 관광을 시켜드리려고 계획을 했다. 나는 시간이 없어 갈 수가 없어 택시를 예약한 뒤 그에게 함께 다녀오도록 부탁을 했다. 그는 택시보다는 지하철과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며 두 분 목사님을 모시고 나갔다. 물론 경비는 쉰 배 이상 절약하게 되었다. 그때도 나는 그에게 별도의 수고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교회에서 지급하는 사례비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도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은 데도 말이다.
그는 간혹 ‘이글’이라는 그를 닮은 십 대 초반의 소년을 교회에 데려오곤 했다. 그 소년은 그를 닮아 아주 잘 생겼는데 말이 항상 적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라고 당연히 여겨지는 그 소년은 늘 어두워 보였다. 랩 시묘노 비치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숙형(寄宿形) 선교 훈련원 ‘월드 비전 하우스’에 입주하기 위하여 지원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그는 그곳에 ‘독신(미혼)’이라고 적여 있었고 가족 란에 함께 사는 가족은 ‘어머니(환자), 누이(환자), 아들 하나, 딸 둘.’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를 불러 물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 적혀있는 것이 사실이라고만 했다. 나는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미혼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될 수 있느냐 고 물었다. 그는 입을 열어 그 가정이 처해있는 슬픈 이야기를 그저 덤덤히 글을 읽듯 말했다. 그는 그의 말대로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병상을 의지하고 누워있으며 누이는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남자를 알아 아버지가 다른 세 아이를 차례로 집에 데리고 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도 병을 얻어 어머니 곁에 누워 있다. 그래서 그 누이의 세 아이들을 그의 호적에 올려 그의 자녀로 두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의 말대로 독신이었다. 세 자녀가 있는 아빠였지만 그는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난 놀라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오랫동안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나는 입을 열어 이제껏 사랑했던 사람도 없었었냐고 물었다. 그는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그의 집에 들어와서 함께 살아갈 사람은 없었고 그렇다고 병든 두 여인과 어린 세 아이들을 두고 그도 집을 나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후로 우린 참 많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서로를 안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스물한 살이나 어린 나에게 한 번도 자신의 태도를 흩트리지 않고 늘 예의를 지켰다. 언제라도 그는 제자의 모습으로 선생을 따르듯 나를 존중해 주었다.
그는 나의 큰 의지가 되었다. 그가 교회에서 설교할 때면 그의 목소리는 그의 몸집만큼이나 크고 저렁 저렁했다. 훗날 큰 부흥사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내 곁을 떠났다. 나의 사정으로 인해 잠시 선교지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땐, 그는 어느 독일 선교사를 후원자로 맞아 그 옆에 서 있었다. 더 큰 그릇의 스승이 필요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떠난 그가 몹시 그립고 보고 싶던 어느 날, 그는 한 바구니의 빵을 사들고 내 방문을 두드렸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빵만을 씹었다.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일만 하면 되지 않는 가. 이 땅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면 저 나라에서 만나면 될 것 아닌 가.’
내 입속에서 빵과 함께 씹히던 말이다.
오늘은 더 그가 많이 보고 싶다.
그의 큰 눈과 그의 큰 어깨가 잊혀지질 않는다.
맥가이버 형제!
어디에서나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