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에서 만난 신사, 변 알렉세이 우레노비치

by 김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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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에서 만난 신사 변(卞) 알렉세이 우레노비치

알렉세이 우레노비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즈베키스탄의 옛 수도인 사마르칸트에서 사역하시던 선교사님께서 일단의 사역을 맺고 급히 미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그 선교사님이 하시던 신학교와 교회를 내가 당분간 돌보기로 하면서부터였다. 내가 처음 소개받은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네 시간 동안 비행기로 날아간 사마르칸트 공항에서 마중 나온 그를 처음 만났다. 오십 대 초반의 선비 타입의 온화한 인상을 가진, 한국말을 곧잘 하는 고려인이었다. 모스크바는 찬바람이 남아있는 이른 봄이었는데 그곳은 영상 40도를 웃도는 한 여름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곳은 이 삼십여 년 전의 한국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있는 듯했다. 빡빡머리의 웃통을 벗은 맨발의 아이들이 나를 향해 껌이 있냐고 물어왔다.

우리의 농촌에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듯이 그곳에는 빨간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는 체리나무들이 집집마다 있었다. 먼지 풀썩거리는 길거리엔 나귀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들판엔 목동이 이끄는 양 떼의 무리도 있었다. 그곳에는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이 있었지만 우즈벡 민족들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회교의 나라였다. 알렉세이 우레노비치는 사마르칸트 종합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있었는데 미국에서 오신 한국 선교사님을 만나고부터는 그와 함께 신학교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신학교에서 그의 직위는 유일한 직원의 교무처장이었다.


그는 첫 부인과 사별을 하고 사마르칸트 대학의 교수인 고려인 여성과 재혼하여 살고 있었다.

전 부인에게서 세 자녀가 있었으며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사샤’라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처음 만난 그 이른 아침 공항에서 그는 곧장 뜰이 있는 가정집 같은 곳에서 영업을 하는 식당으로 날 데리고 가 주었다. 거기서 낯선 맛의 수프와 보름달처럼 생긴 빵을 먹었다. 그는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훨씬 어린 나를 극진히도 대해주었다. 그 후로 나는 먼 옛날 실크로드가 통과한 그 먼 곳을 한 달에 두 번씩 비행기를 타고 그곳을 오가며 그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네 시간 동안의 비행시간을 오가는 그 길을 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듯 부지런히 다녔다. 예닐곱 명 되는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교회에 모여든 고려인들에게 통역 없이 우리말과 러시아 어를 섞어가며 설교를 했다.


한 번은 그곳의 문화회관을 빌려 집회를 했는데 회관을 꽉 매울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였었다. 사흘 동안의 집회가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많은 병자들이 그 자리에서 병이 낫고 간증을 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해만 지면 새벽까지 밤 새 자지 않고 운다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날 예배를 참석하고 기도를 받고 돌아가 처음으로 울지 않고 밤을 지냈다고 다음날 집회에 그 아이의 어머니가 나와 간증을 했다. 암이 치유된 사람도 있었다.


집회를 마친 다음 날 숙소로 사마르칸트 신문의 기자가 날 찾아왔다. 우즈벡 여성이었는데 그도 집회에 참석했었다고 했다. 그들 신문사에서 특집으로 ‘살아있는 위인들’이란 제목으로 시리즈 기사를 내고 있는 데 지난 호에서는 현직 이스라엘 대통령을 취재하여 실었는데 이번호부터 나를 취재하여 싣고 싶다고 했다. 나는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는 위인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이 이유를 댔다. 첫째로 사마르칸트가 생기고 회교가 아닌 다른 종교 집회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고, 두 번째로 어떻게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병자들이 기도라는 것으로 치료함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고 그러기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지만 하나님을 취재할 수 없으니 당신을 취재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하며 통역자와 함께 나의 관한 얘기들을 오래 동안 주고받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신문의 지면 이분의 일면 크기의 기사가 두 번에 걸쳐 나왔다. 알렉세이 우레노비치는 그 신문을 후에 전해주었고 사마르칸트 대학의 교수인 그의 부인은 ‘사마르칸트의 기독교 전래’라는 그녀의 저서에 그 신문의 내용을 실었다.


그러던 시간들이 흐르고 신학교의 신입생을 모집할 시기가 되어 신문에 광고를 냈다. 서류 심사와 면접으로만 학생을 뽑게 되었는데 열두 명의 학생이 지원을 했다. 원래 소련연방의 교육 제도가 학비는 전액 무료이고 매달 학생들 모두에게 장학금을 주게 되어 있다. 일종의 생활비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돈을 벌 수 없으니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필요한 생활비를 국가에서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신학교에서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입학을 위한 전형으로 면접을 해보니 대부분이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는데 장학금 때문에 온 이들도 있어 보였다. 그리고 심각한 것은 아직 한 번도 교회를 안 나가 본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면접을 마치고 교무처장인 알렉세이 우레노비치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학교 방침이 웬만하면 붙이는 쪽이었는데 나는 지원자들을 다 받는 다 하더라도 한 번도 교회에 나가보지 않았던 두 사람은 받기가 곤란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신학교 교무처장인 자신도, 지금 있는 신학생들도 1년 전에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들이 목사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를 계기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는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면 이들이 다시 예수님을 만날 확률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긴장하고 기다리고 있는 지원자들에게 모두 합격을 통보했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미국으로 가신 선교사님께서 다시 돌아오셨고 나는 더 이상 꿈속 같은 그곳을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선교지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곳엔 지혜롭고 선한, 나중에 시작했지만 나보다 훨씬 먼저 달리고 있던 알렉세이 우레노비치씨가 있다. 나중에 들었던 얘기로는 미국에서 돌아온 그 선교사님과의 불화로 헤어지고 다시 대학교로는 복직이 될 수 없어 어려움을 당하다 다른 여자 선교사님을 도와 사역하고 있다고 했다. 어디를 가나 선교사가 문제다. 그 착한 사람들이 한둘씩 실망하고 있다. 그의 소리 없는 미소가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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