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자를 넘어, 김 스베틀라나 호구브나

by 김다윗

2


통역자를 넘어 김(金) 스베뜰라나 호구브나

1991년도 7월 7일 아르바뜨 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첫날 12명이 예배를 드렸다.

통역자가 없어 애를 먹었다. 통역자 없이 설교를 해보려고 준비했지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왔다. 김 스베뜰라나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나의 통역자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어떻게 나를 알았느냐고 물으니 나에게서 한국어를 배웠다고 했다. 한때 한국어 학교에서 고려인들을 잠시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게 배웠던 모양이었다. 오십 대 후반의 여성으로 만나보니 얼굴이 익어 있었다. 나와의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설교 통역으로는 미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했고 나에게 마땅한 사람이 없기도 했기에 같이 일하기로 했다. 보수는 월 50불로 했다. 다른 교회 통역자보다는 많이 적은 금액이었다. 나의 지급 능력이 그러했고 또 그녀도 그것에 선뜻 동의했다.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주중에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토요일엔 설교 내용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열심이 있었다. 모르는 것은 내가 귀찮아할 만큼 끈질기게 물어왔다.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함께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 통역이 아니라 그의 신앙에 관한 회의함이었다. 설교는 통역하지만 그의 마음은 도무지 그 내용을 납득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녀는 젊었을 때 북한에 유학을 했었고 거기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접한 자본주의자들이나 기독교인들이 그녀에게 생소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이해하기 전에 내가 그녀를 이해해야 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설교는 통역하지만 그 내용을 자신에겐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자괴감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나는 바로 곁에 서있는 통역자를 감화시키지 못한 채 멀찍이 앉아있는 교인들을 상대로 그것도 통역자의 목소리를 통해 복음을 외쳐야 만 했다. 참으로 우리 둘 사이에 곤고함이 흐르는 시간들이었다. 점차 설교 통역은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즈음에 다른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 교회는 예배에 온 사람들에게 항상 선물들을 준다는 것이었다. 치약이나 샴푸나 스타킹이나 심지어는 돈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통역자인 스베뜰라나 씨는 우리도 선물을 주자고 나에게 제의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그 의견에 반대하는 나를 그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은 고질적인 병으로 늘 병상을 의지하고 살았다. 그들에겐 장성한 미혼의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스크바 교외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입원 중인 남편을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뻐하며 나와 함께 그 병원으로 갔다.

처음 만난 그녀의 남편을 위해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물론 그녀가 그 기도를 통역했다. 그들 부부는 나의 방문을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감격해했다. 그 후로 스베뜰라나 씨와 나는 신앙을 떠나서 많이 친밀하게 되었고 그녀의 남편도 회복되어 퇴원하게 되었다.

점차 그녀는 신앙에 관심을 쏟게 되었고 성경 말씀을 귀담아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자주 사람들에게 ‘우리 선교사님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다녔다. 아무튼 그 고백은 참으로 고무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물들어 있던 한 지성인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세계가 서서히 무너지는 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그녀에게 중요한 전기(轉機)가 있었다. 어느 주일 예배에 그녀를 스카우트해가려고 온 사람이 있었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한국 종합 상사에서 나왔는데 예배를 마친 후 그녀와의 오랜 얘기 끝에 나를 찾아왔다. 이야기인즉 스베뜰라나 씨를 자기 회사의 직원으로 데려갔으면 하는 말이었다. 그녀 자신도 내가 허락만 한다면 그 회사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듣기로 그곳에서 그녀가 받을 수 있는 보수는 우리 교회에서 받는 액수와는 딱 열 배가 많았다. 난 두 사람을 세워두고 말했다.

모든 결정은 그녀의 자유이며 내가 스베뜰라나 씨를 붙들 수 없는 이유는 그 회사만큼의 경제적인 대우를 해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동안 그녀의 통역은 내가 불편을 느끼지 못할 만큼 많이 좋아져 있었다. 다시 통역자를 구할 것이 걱정이었다.

그날 밤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곰곰이 생각했는데 그 회사로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한 말을 전해주었는데 “당신이 그 교회와 김 선교사님을 버리고 그 회사로 가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계십니다.”며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의 신앙에는 놀랄만한 성장이 있었다. 한번 고백한 그녀의 신앙은 변할 줄 모르고 열매를 맺어갔다. 어떤 사람이 신앙에 대해서 나에게 물어오면 나의 대답을 통역하다 때론 나를 제쳐두고 그 자신의 경험과 신앙을 간증하곤 했다. 어떤 날엔 예배 후에 그날의 설교가 참으로 감동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설교 통역 중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때로 다른 곳으로 초청받아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같이 가다가 “오늘은 무슨 설교를 했으면 좋겠느냐”라고 물으면 오늘은 청소년 집회이니 이런 내용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로 그녀는 단순한 나의 통역자가 아닌 꼭 필요한 동역자가 되어 주었다. 누구를 심방했으면 좋겠다거나 어느 누군가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거나 하는 조언과 정보들을 가까이에서 전해주었다. 그리고 교인들도 그녀를 통해 나에게 접근해왔다. 나 자신도 교인들에게서 연락이나 심방 요청이 오면 그녀와 주간(週間) 스케줄이 어떤지 상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건강에 대해서도,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어머니처럼 가까이서 돌보아 주었다. 선교비 후원이 수월치 않아 몇 달치의 월급이 밀려도 그는 아무런 불평 없이 잘 기다려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십일조도 자진해서 드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했다. 그리고 그녀는 특히 통역에 있어 품위 있는 단어와 수준 높은 어휘를 잘 골라내어 통역함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 나 역시 어느 곳에서나 그녀를 자랑했고 모스크바에서 가장 뛰어난 통역자가 그녀라고 생각했다.

사실 선교사들은 통역자 때문에 많은 애를 먹었다. 서툰 통역자들을 겨우 훈련시켜 제대로 해 놓으면 대우가 나은 다른 교회나 모스크바 주재 한국 기업으로 옮겨가는 예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통역자로 인해 다투는 일들이 많았다. 통역자들끼리도 그들의 협회를 만들어 자신들의 힘을 키워나가기도 했었다. 그 무렵 스베뜰라나 씨에게도 다른 선교사님들에 의해 더 나은 대우로 스카우트 제의가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은 그의 아들이 자동차 정비 센터를 차렸는데 마피아가 방해를 했다. 요구하는 만큼의 돈을 주지 않으면 아들을 죽인다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엔 그런 일이 흔했다. 아무리 조그마한 가게라도 마피아가 다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정량의 수입을 그들에게 상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게를 파괴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길 가에 세워둔 자동차가 화염에 휩싸이기도 하고 가게가 불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마피아들의 짓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그런 일이 그녀의 아들에게도 닥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있는 돈을 다 모아서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함께 기도했다.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는 거듭 기도드려주기를 부탁했다.

며칠 후 그녀는 웃으며 돌아와 돈을 도로 주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후 우리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가장 모범적인 집사가 된 것이다. 그 후 난 그녀를 격려하고 또 그녀의 신앙 훈련과 한국어 연수를 위해 그녀가 한 달간의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그런데 친한 동료 선교사들이 나의 의견에 반대했다. 고려인들의 가장 큰 꿈이 한국 방문이고 그것을 위해 한국 선교사들과 일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한국에 다녀오면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고 있는 현재의 보수가 지극히 작은 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후에는 적응을 못해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때에 그녀가 우리 교회에서 받은 보수가 100불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갔다 오기만 하면 보수가 더 나은 곳으로 옮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진행했다. 서울의 자매교회인 신일 교회에 연락해서 부탁을 드렸다. 교회에서 숙식을 하며 교회 예배와 프로그램에 참석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목사님께서 배려를 해주시겠다고 알려 왔다. 그리하여 그녀는 두 개의 그녀의 조국중 가보지 못한 남쪽의 조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간간히 서울에 있는 그녀에게서 연락이 있었다. 한 달 후 모스크바로 돌아와 나를 만난 자리에서 한 그녀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안전한 그 나라에서 살던 분이 어떻게 여기에 와서 생활할 수 있습니까?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나라는 내 조국이고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내 조국인 천국에도 언젠가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항상 그 하늘나라의 그 조국도 생각해야지요.”

선교지에서 일하다 보면 통역자는 참으로 중요한 동역자이다. 통역자는 선교사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얼굴이기도 하다. 선교사들은 통역자를 통해서 일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통역자는 선교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통역자들은 선교사를 가장 잘 알게 된다. 그래서인지 한 통역자가 한 선교사와 오래도록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스베뜰라나 씨와 나는 4년이 넘도록 함께 일을 해오고 있다. 지금껏 모스크바에선 유일한 경우다. 한 번 만나 끝까지 함께 하는 경우가 말이다. 선교사에게 가장 큰 축복을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나에게 허락해주셨다. 그녀에게도 우리의 주님은 통역자의 길을 통해 가장 값진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 모두에게 내려진 과분한 축복이다.

이전 01화첫 인연, 첫 사람 신 룰랴 그레고리예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