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프니까 아프리카다

by 김다윗

어떻게 온 아프리가인가. 우리가 여기 이렇게 먼 땅 마다가스카르엘 왜 오게 되었는가.

이곳 마다가스카르는 골프라운딩을 하거나 연습하기에는 천국이다. 캐디가 170명이 넘는 골프장에 매일 평균 라운딩을 하는 사람은 스무 명이 채 안된다. 라운딩을 하다 보면 앞에서 가는 플레이어도, 뒤에서 따라오는 팀도 없다. 간혹 앞 뒤로 라운딩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급할 것이 없고 마음에 드는 샷이 나올 때까지 몇 개의 공이라도 칠 수가 있다. 어쩌다 뒤따라오는 팀이 있어 부담이 되면 먼저 보내면 그만이다.


매일 골프장에서 살았다


두 딸은 정말 열심히 골프를 쳤다. 작은 생수병의 물을 여러 개 얼려가서 덥고 지칠 때마다 들이켰다. 필요할 때마다 현지 프로의 레슨을 받았다. 레슨비도 저렴했고 가르침도 자상하고 신사다웠다. 아침 일찍 골프장으로 가서 가장 늦게 골프장을 빠져나왔다. 쉬는 날도 없었다.


늦게 호텔로 돌아오다 보면 더운물이 남아있지 않아 샤워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매끼마다 호텔에서 한식을 제공했지만 한식이 현지화가 되어서인지 너무 기름지고 짜서 먹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간이 되어있지 않은 삼겹살을 자주 시켜 먹었다. 조식은 현지 라면이나 누룽지를 끓여 주었지만 입에도 덜 맞아 식탁에 앉는 일이 점점 고역이 되었다.


그러다 배탈이 우리를 찾아왔다. 골프장에도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배가 너무 아파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었다. 토하고 설사를 하고 탈진했다. 기어서 차례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호텔에선 유효기간이 2년이나 지난 정관장을 주었지만 그것은 우릴 치료하지 못했다. 딸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었다. 배가 아픈 것보다 골프를 할 수 없는 것이 더 아팠다. 사흘동안을 물도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어떠한 의료적인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단지 우리 몸이 가진 자연치유력을 믿고 의지하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최고의 약인지, 그러다 마침내 우리는 서서히 배탈을 이겨내고 힘을 찾았다.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다시는 아프지 말자고 서로 다짐을 했다.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제 두 달이 남았다. 어떤 날은 18홀을 돌고 또 18홀을 돌았다. TV도 없는 호텔방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라면을 먹고 곧바로 골프장을 향했다. 골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했고 하루하루 흐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하루가 저물 때마다 달력에 표시를 했다. 다시는 못 올 이 아프리카에서의 골프연습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했다.


싱글을 치다


두 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싱글을 쳤다. 프로지망생에게 싱글을 치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아프리카에 와서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싱글을 기록한 것이다. 클럽하우스에서 피자 한 판으로 우리끼리 축하를 하고 기념을 했다.


딸이 쓰러졌다


싱글을 친 다음날 아도니아가 드라이빙레인지에서 연습을 하던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고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곁에 있던 현지인 J프로가 놀라서 아도니아를 안아서 클럽하우스 소파에 눕혔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119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놀란 나는 아도니아를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감사하게도 얼마 후에 아도니아는 깨어났고 정신을 차렸다. 연습을 중단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매일 호텔에서 골프장까지 왕복 두 시간을 매연이 가득한 도로를 오가는 것도 시간이 너무 아깝고, 선뜻 식탁에서 숟가락을 집어 들기 어려운 음식을 계속 먹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한 달에 이백만 원을 호텔에 지불하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캐디, 캐디들


골프장을 드나드는 교민들과는 거의 만남이 없었지만 캐디들하고는 늘 잘 지냈다. 여기는 모두 남성 캐디들만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일이 없었다. 일을 하려는 캐디들에 비해 라운딩을 하는 골퍼들의 수가 턱없이 적어 대부분의 캐디들은 출근을 해서 손님들에게 지명을 받지 못하면 기다리다 오후가 되면 그냥 귀가를 한다. 캐디들의 시장한 눈을 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골프장에서 코스 관리를 하는 프로가 있었다. 영어로 대화가 가능해서 간혹 같이 라운딩을 했던 그에게 170여 명의 캐디들에게 하루분의 캐디피를 다 나누어 주도록 부탁을 하고 큰 봉투에 든 돈을 전달했다. 내가 주었다는 것을 비밀로 해줄 것을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비밀이 지켜지지 않았는지 다음날부터 모자를 벗고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캐디들이 적지 않았다.


골프장이 있는 마을로 이사를 가다


아도니아가 쓰러진 다음날에도 골프장엘 가서 연습을 했다. 그리고 나는 캐디들에게 골프장 부근에 우리가 살만한 집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들 대부분은 골프장 부근 마을에 산다.


금방 한 캐디가 집을 구했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왔다. 자그마한 이 층 분홍집이 비어있는 채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1층엔 침대 두 개가 겨우 놓여있는 자그마한 방과 그 옆에 그만한 거실, 그리고 수세식이지만 물이 없는 화장실이 있고 2층엔 텅 비어있는 거실과 싱크대와 조리기구가 있었다. 마당에 우물이 있어 물을 길어 밥을 짓고 화장실엔 물을 날라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주변에선 보안이 가장 큰 문제인데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인 마을에 사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소문을 들은 교민들은 말렸다. 현지인이 사는 마을에 외국인이 사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안 그래도 일 년에 몇 번씩은 외국인 상대로 범죄사건이 일어나서 한국대사관에서는 조심을 시킨다고 했다. 하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 통하지 않아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달간의 호텔생활을 정리하고 이사를 강행했다.


스토킹을 시달리고


이사를 간 집에서 골프장까지의 거리는 오르막길 도보로 25분가량이 소요되었다. 아침에 골프장에 도착하면 온몸이 땀에 젖었다. 다행히 골프채는 클럽하우스에 보관을 할 수 있었지만, 매일 골프장을 오가는 길은 너무나도 큰 고역이었다. 집을 나서자마자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우릴 외계인을 보듯이 쳐다보았다. 하루종일 연습을 마치고 지쳐 돌아오는 도로가에 까맣게 늘어서 우릴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우리를 해칠 것 같았다.


더욱이 저녁을 위해 요리할 식재료를 날마다 사는 일은 고역이었다. 길거리의 주민들은 우리가 무얼 사는지, 얼마만큼을 사는지, 얼마를 내고 또 거스름돈은 얼마나 받는지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 게 중에는 대놓고 손을 벌려 돈을 달라는 이도 있었다. 대부분의 가정에 전기가 없어 잠들기까지는 도로가에 서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남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마리아를 부르는 소리는 일상이 되었다. 그중에는 날마다 마리아를 따라다니는 청년도 있었다. 그 청년은 꿈에도 나타나 우릴 괴롭혔다.


골프만 빼면 모든 게 힘들었다. 우리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TV도 인터넷도 안 되는, 우리 셋 외에는 말이 통하지도 않는 이곳에서 우리는 깨어 있어도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체중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곳으로 온 지 두 달 만에 나는 12킬로그램이 빠졌고 마리아는 5kg, 아도니아는 10kg이 빠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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