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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이취미 Jan 17. 2022

비움이 주는 공간과 자유

비울수록 보이는 것들


초저녁이다

여름 해가 길다

멍 때리기 좋은 시간이다


낡은 침대

책상

의자 몇 개

다리가 시원찮은 식탁

이것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던 엔틱 뷰로

밑창이 헐거워진 엠디에프 공간박스에

딸아이에 고등 문제집을 구겨 넣고서


나도 남들처럼

집을 꾸며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이사를 했었다



멋스러운 스탠드와

향이 좋은 캔들도

이사하면 구입하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딸아이가 쓰던

블루투스 LED 등이

그런대로 괜찮다


역시 먼지청소는 싫다


우리 집엔 티브이가 없다

어찌어찌 없게 되었는데

다시 들이지 않았다

여섯 살이던 딸아이도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티브이에는 별 말이 없다


내가 티브이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티브이를 볼 시간이 없었다

퇴근 후엔 정해진 일들과

행동반경에서 벗어남 없이

나는 늘 바빴다



무엇이 나를

늘 분주하게 했던 것일까


미니멀 라이프

슬로 라이프

심플 라이프

간소한 삶


그렇게 사는 건 어떤 삶일까?


왠지 모르게

첫눈에 반하듯 끌렸다


뭔가 홀가분해진다는데

쓸데없는 것들을 비우는 거라는데

단순한 삶을 사는 거라는데

나야말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만난 미니멀 라이프


미니멀 라이프를 알기 전과 후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건들을 놓아주면서

나를 놓아줄 수 있었고

더 이상 맹목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나에게 맹목적인 삶이란

스스로에게 의무와 책임의 틀만 주는

그런 삶이었다


누구에 강요도 아닌

스스로 멈출 줄 알고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 내고

필요한 것들은 채워 넣을 줄 아는

그런 내가 되고 싶었다



최소한의 수납공간에

최소한의 수납을 하고

모든 수납은 반만 채운다


용도가 불분명한 물건이나

단지 아까워서

의미 없이 두는 물건은

이제 없다


그런 것들에 대한 비움으로

수납에 대한 스트레스가 사라졌고

먼지 청소에 대한 숙제 같던 마음과

불필요한 집안 노동들도 없어졌다


그로 인해

진정 자유로운

나만의

구애받지 않고 쫓김 없는

시간들이 주어졌음을 느낀다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를

모아 두지 않고 분산시켜 둔다

키가 낮고 작은 가구들은

공간이 넓어 보이고 답답하지 않다


비움 하려던 화분 박스에

인터넷 공유기를 숨기고

딸아이가 자주 쓰는 고데기를 두었다


내 눈에 편하면

그것이 인테리어다

형식에 얽매여

공간을 빼앗기지 않는다



최소한의 공간을 이용하되

딸아이 책이 늘어날 것도 예상한다


서랍들은 또 다른 가구가 되고

수납 거리가 늘지 않으면

한 공간에 모두 둘 수 있다



내겐 필요치 않지만

딸아이의 즐거움과 소소한 재미를 위한

공간도 잊지 않는다



딸아이가 혼자 쓸 수 있도록

작은 써큘레이터도 두었다


줄이고 비우되


최소한의 필요한 것에는

관대한 소유도 한다


비움을 목표로

불편함을 참지 않는다



맨 처음

식기 건조대를 비움으로서

나의 미니멀 라이프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벌써 2년 8개월 전이다

천 한 장으로 그릇 건조가 끝나고

제자리도 쉽다


불편함이 없다

간결하다



비우고 줄여서

헐렁해진 부엌 살림살이들은

또 다른 홀가분함을 내게 주었다


매번 품목만 바꿔

재탕 세일을 하는 마트 전단지에도

이제는 더 이상 눈길이 가지 않는다



주방 비누로 그릇을 닦고

주방세제를 사놓지 않게 된 후련함도 좋다



모으고 채우고 저장해도

늘 부족하고 아쉬웠던 마음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집안 어디를 둘러보고 열어 봐도

물건은 반도 차 있지 않지만

부족함보다는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이전에 나는

한가로운 삶이나

여유로운 삶을 동경할 때면

늘 이다음에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때가 오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이제 나는 안다

그런 삶은 때가 되면 오는 게 아니란 것을


그런 삶은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고 말고는

내 맘대로 못하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지금 벽장에

망설여지는 물건이 있다면

보고 있으면 후회만 될 뿐인 물건을

아직 못 비웠다면


단 한번뿐인 삶

단 한번뿐인 인생을 생각하고

지난날의 나를 비우길 격려해 주고 싶다


안 보면 잊힌다


그것들을 붙잡고 상심하기엔

우린 너무 젊기 때문이다




written in 201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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