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집안일이 줄었다
일상의 작은 평온을 만들어 간다
written in 2019.03.12
보리차를 끓이면서
아침이 시작되었다
딸아이의 간식으로
계란을 한 바가지 삶았다
부엌 창밖이 훤 한 것이
봄이 오는 모양이다
겨울 이불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이불 정리를 해야겠다
겹쳐 넣어 덮던 솜 한 개를 빼냈다
봄 날씨에 맞는 가벼운 이불이 되었다
계절별로 이불을 두지 않고
사계절을 이불 한 세트로 지낸다
얇은 솜과 조금 두꺼운 솜 한 세트로
겨울엔 솜 두 개를 겹쳐 넣어 덮고
봄가을엔 얇은 솜과 조금 두꺼운 솜을
날씨에 따라 넣어 덮는다
솜을 모두 뺀 홑청은
2겹의 순면 여름 이불이 된다
주방에 가장 깊은 수납공간 키 큰 장
물건의 둥지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이곳
계절별 옷을 접어 보관했던 이곳은
그동안의 비움 과정에서
빈 공간이 되었고
이제는 우리 집 이불장이 되었다
물건을 비우니 이불장이 생겼다?
의자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엌 키 큰 장
일 년에 몇 번쯤의 이불 수납은 어떨까
싱크대에 이불을 넣으면 이상할까
솜 2개가 모두 나오는 여름에도
길쭉하게 접어 동그랗게 말아 넣으면
이곳에 모두 들어간다
매트리스 커버와 패드도 여벌 없이
해가 좋은 날 세탁하고 씌운다
왜 항상 여벌의 침구가 필요했을까
커다란 이불장도 필요하지 않겠다
봄이라고
계절 따라 기분 전환으로
침대커버 이불 커버를 바꾼다지만
나는 간소한 살림살이와
그래서 더 가벼워진 일상으로
기분전환을 대신해본다
이불 정리를 한 날이지만
시간에 쫓기지 않았다
휴일이 반이나 남았다
지치지 않았다
키 큰 장 아래칸은
보관할 서류와 여유분의 쌀 그리고
딸아이의 여름 면티와
2명 모두의 사계절 실내복을 접어 두었다
접어서 두는 옷들의 마지막 기록이 될 것이다
앞으로 실내복까지 모두
세탁 후 그대로 옷걸이에 걸어
수납하는 것이 목표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불편할지
물건의 장점과 단점을
생각하며 소비하지 못했었다
나는 물건들에게 좀 더
용의주도해지고 싶었다
12킬로 통돌이 세탁기에
솜과 홑청이 일체인
2인용 극세사 이불이 수월하게 들어갈까
의심 없이 들이고
다섯 해 겨울 동안
떠오르는 이불을 두 손으로 눌러가며
세탁기 옆에서 벌을 서곤 했다
세탁소의 편리함을 이용하기보다는
몸을 쓰는 살림을 고집했던 나는
주말 한나절을 그렇게 보내며
이불 빨래를 했었다
이제 해가 있는 날 홑청을 벗겨
가볍게 세탁해 씌워 덮는다
덩치 큰 이불 때문에
또 적은 식구 수로
빨래를 모아 돌리던 세탁기도
작은 세탁기를 쓰게 되었다
지난날...
틈만 나면 언제든 '정리'가 시작되었다
계획에 없던 물건을 들인 날
뜻하지 않게 사은품을 받던 날
마트에서 생필품을 세일하던 날
양말 한 켤레만 생겨도
나는 '정리'를 해야 했다
집안 어느 장소에 시선이 멈추면
갑자기 시작되었던 정리
무계획이 계획인 것처럼
귀한 휴일 하루를 홀랑 내어 주며
수시로 나는 정리 귀신이 되었다
사용하는 것만 두고 사는 것이
필요한 것들만 추려내서 사는 것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고르는 것이
나도 누군가도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파를 좋아한다
이곳저곳 볶음요리 국 찌개에
듬뿍듬뿍 넣어 먹는다
초록색 야채가 아쉬울 땐
아낌없이 파를 팍 팍 넣어 먹는다
이불 홑청이 세탁기에 있는 동안
파를 씻고 물기를 빼놓았다
그 김에 식초를 조금 풀어 개수대를 청소한다
산지에서 다듬어 묶여온 파가
나에게로 오는 동안 마른 겉잎이 생긴다
양파껍질이 더 영양가 있듯
대파도 버릴 것이 없다
마른 대파 껍질로 육수를 우리고 나니
김치통 바닥에 남은 신김치가 생각난다
두부를 듬뿍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부엌일이 어렵고 버겁다면
소꿉놀이처럼 해보자
자세히 보이니 먹을만한 것이 많아졌다
여유가 생겼다
쓰던 냉장고를 반으로 줄이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반도 안되게 줄였지만
상상했던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헐렁한 냉장고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게 먹거리를 주었고
작은 냉장고는 편리했고
주기적인 청소는 필요 없었다
이제 그 정리 귀신은
남들이 그게 뭐가 문제인데
왜 문제인데 하는
다수가 궁금해하지 않는 그런 것들에
재미를 들이고 연구를 하게 됐다
먼지포 사용을 끊은 후
나는 좀 더 게을러지기로 했다
집안 노동을 쉽게 또 줄이기 위해
좀 게을러지는 것이
깔끔은 이제 그만 떠는 것이
내게 필요했다
어딘가에서 봤던 고무장갑을 끼고
옷 먼지를 터는 것이 생각났다
고무장갑에 물을 살짝 묻혀 털어낸 후
양쪽으로 밀어 보니 먼지가 잘 밀렸다
앞 뒤로 쓰고 마음껏 게을러지면서
걸레 세탁 횟수를 줄여 본다
봄이 오니 나도 변했다
어차피 바닥용이니
마음은 내려놓는다
계절을 아우르는 옷들이 좋아졌다
계절을 넘나드는 옷들에게 반한다
내 짧은 다리를 가려 주고
어쩌면 조금은 다리가 길어 보이는
착시현상도 주었을 니트 주름치마
작년 가을의 시작부터
레깅스 한 장과 함께 겨울 또 지금까지
그리고 이 봄이 다 지나도록
세 번의 계절을 입고 또 입을 것이다
작년 가을 직장에서 만난 선배는
한 달간 내 옷차림을 본 후
어느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난 자기처럼 옷을 입고 싶어...
몇 가지밖에 못 봤을 텐데요?
맞아 그러고 보니 몇 가지밖에 못 봤네...
근데 난 왜 자기가 옷이 없다고 생각 못했지?
그 선배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몇 가지도 안 되는 내 옷차림에
가뜩이나 회색 미치광이가 되어 가던 나에게
왜 호감을 느꼈던 것일까
선배가 본 것은
선배가 끌렸던 것은
단순함이 주는 편안함이 아니었을까
미니멀리스트에게
패션은 무엇일까
개인 취향이겠지만...
좋아하는 옷을 즐겁게 입는 것
의무적으로 옷을 입지 않는 것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잘 고를 줄 아는 것
그리고 약간의 절제를 곁들여 입는 것
그로 인해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옷장 정리가 필요 없는 것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면서
나는 더욱더 그 진실을 잘 알게 되었다
옷장 정리는 수월했다
그리고 평온했다
계절이 바뀔 때면 무언가
숙제 같은 할 일들이 있었다
그랬었다
봄은 왔지만
나는 대청소를 하지 않는다
묵은 먼지는 없다
이제는 계절이 바뀌어도
지내던 대로 지내면 되는 것이다
익숙한 시간들이 흐른다
그런 익숙함이 좋다
목적도 없이 그토록 열심이었던
습관적인 일상들이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더라
무엇을 따라 할 것도
무엇에 집착할 필요도 없는
내게 중요한 것들을 찾고
그것들을 알아가는 시간을 즐기며
매 순간 그런 생각들에 답을 구할 뿐
그런 간소한 삶을 살고 싶다
종종거리며 살던 내가
그게 숙명인 줄 알고 살던 내가
종일 재즈음악을 틀어놓고
ebs 테마 기행을 보고 있다
그럼 된 거다
그렇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