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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이취미 Feb 08. 2022

작은 집, 공간에 나를 담다

내가 우선이 되는 공간


솜 빠진 홑청을 반으로 접어

침상 정리를 끝낸다

쉽다 편하다

여름이불로 더없이 좋구나



18평이라지만

13평쯤 될까


변두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교통과 편의시설이 좋다는

서울 복잡 동네로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보다

형편에 맞춘 작은 빌라 탑층으로

이사하게 되었던 나는

어쩐지 내 인생이 후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베란다만 크고

길고 좁다란 부엌을 가진

거실은 이름만 있는 이상한 구조에

이 집을 만나고

나도 남들처럼 구색을 갖춰

꾸밀 생각이 서로 부딪치면서

심란했었던 것 같다


셋집을 얻어 살 땐

맑게 닦고

어루만져 놓고선

늘 뒤돌아서서 떠나는 내가

서글펐다

짠 했다


떠나지 않고 싶었다

떠나지 않고 머무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현재를 저당 잡아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살려고 애썼다


10년은 너무 길어

5년을 계획하면서 살았다

살아보니 5년 후에 나아진 건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렇게 살고 있었다

현재를 저당 잡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멈추지 않았더라면

삶에 방향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나은 더 큰 집을 위한 삶을 살다가

환갑을 맞이 했을지도 모르겠다


푸쉬킨이란 시인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고 했던가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90년대 서점에서 책을 사면

시구절이 적혀 코팅된 책갈피를

꽂아 주던 생각이 난다


그때 그 책갈피들에 시구절들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래서 결론은

삶이 나를 그렇게 속이더라는...



2단 행거가 이제는

부담스러워질 만큼

간소해진 옷방은

안쪽 선반 하나를 내리고

튼튼한 스텐 봉을 걸어

헹거를 대신했다


숄과 레깅스 면티 몇 장을 제외하고

위아래 30개 정도로 유지된다

겨울 패딩도 따로 수납하지 않고

그대로 벽에 걸어 둔다


행동을 줄이니

살림 노동은 더욱 간소해진다

수납함에 넣는 정리 행동을

이제는 거의 하고 있지 않다


딸아이의 옷을 같이 두고 지내다 보니

소재나 옷 종류를 참견하게 되어

안방 베란다 공간으로 분리해 주었다

나도 속 편하고

딸도 속 편하고


두 식구 각자의 간소한 생활을 지향한다



남들처럼 나도

소파 앞에는 테이블이 당연했었다


생각과 시야를 갖고 물건을 소유한다면

그것들은 삶에

작게 또는 크게 보탬이 될 것이다


소파 테이블이 없지만

쉽게 옮길 수 있는

작은 가구들이 있다


물건을 용도별로 정해 소유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또 공간을

작게 더 작게 하고 있다


허리 높이를 넘지 않는 작은 가구들은

공간과 시선에 부담이 적다

효율적이면서도

단순함과 편리성을 같이 준다



요즘 여러 가지 공부할 것이 많은

딸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딸아이방에서 책상 겸 화장대로 쓰는

작은 테이블을 들고 나와

나만의 공간을 꾸렸다


좁고 기다란 부엌에서도

작은 테이블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여기서 늦도록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때로는 야식을 먹는 재미도 있다


좁고 길게 빠진 부엌을 보고

실망했었던가? 내가? ^^


공간이 없는 게 아니었다

집이 작아서도 아니었다


내 마음이 공간을 못 보고 못 찾는 것이었다



하늘이 흐렸던 날엔

거실 창가에 두고 앉으니

카페에 온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이런 작지만 소소한

단순하지만

깊은 즐거움을 주는 재미를

알아가게 되었다


작은 가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딸아이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온 날

둘이서 앉아 재미나게 이야기하라고

딸아이방에 넣어 주었던 작은 소파


스 윽 밀어 나 혼자서도

간단하게 옮긴다

작지만 탄탄해서

3년 넘게 잘 쓰고 있다


집 안 모든 가구들을 혼자 옮길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다



딸아이가 쓰던 화장대 겸 책상을

내가 들고 나와버렸으니

떻게 할까

너비가 똑같은 원형 탁자를

책상이 있던 자리에 쏙 넣어 주었다


네모진 자리엔 네모난 가구만 두어야 할까

이제 보니 네모진 자리에

동그라미도 보기 좋더라


내 눈에만 그런가?



가구가 있다 없어진 자리도

정겹기만 하다


공간이 나에게 말을 하는 것 같다


없으면 없는 대로

보기 좋고 편하지 않냐고

그러니 단순해서 좋지 않냐고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있어도

외롭거나 허전하지 않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방문 밖이 훤하다

벌써 이렇게

햇살이 가득하

눈이 부시다


하루 종일 햇살은 모두 내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몇 평인 가요?


우리 집은 35평이야

40평인데 그렇게 안 넓어

17평이라서 아무것도 못 놓고 살고 있어


나는 알고 있다

30평이 10평도 안 되는 공간이 될 수도 있고

15평에서도 10평만큼을 누릴 수도 있고

25평에서 35평 보다 더 넓은 공간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13평에 살면서

뛰어다니며 산다면

농담이냐고 할까?

소리가 울려서

작게 작게 이야기해야 한다면

남들이 웃을까?


그러고 보니

하마터면 13평이 5평만 남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본다



낡은 리넨 치마를 입고

소파에 몸을 누여 본다

지금 나는 작은 소파에 담겨 있다


서랍 속에

바구니에 수납장에

물건이 담겨 있듯

집도 나를 이렇게 담고 있구나


다음번에

내가 다시 새집을 갖게 된다면


그때는

물건을 위한 자리보다

내가 쉬고 놀고 머무를 공간을

먼저 찾아보리라

더 작은집에서 더 넓게 살아 보리라

냄비 하나 화초 하나라도

내가 먼저 살아 보고 들이리라

무엇보다 내가 우선이 된 후

물건들에게 순위를 지어 주리라

나보다 먼저이길 바라는 물건은

결코 들이지 않으리라


주위를 둘러본다


나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담겨 있을까




written in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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