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상이취미 Feb 21. 2022

나를 닮은 옷을 입다

백 벌의 옷장에서도 입을 옷은 없다

 

여름엔 비가 자주 왔다

 

장대비에 슬리퍼

가랑비에 운동화

양산과 우산 겸용 우산

가방과 가방 속 물건이 가벼워지니

우산은 손에 들어도 괜찮다

 

비에 젖어도 금세 마르는

까슬까슬 구김 없는 무릎 치마


비 오는 날 무엇을 입을까

고민 없이 출근한다



데님을 입지 않는 나는

면티로 멋 내기에 한계가 있었다

면티와 셔츠 값은 엇비슷한 반면

잦은 세탁에는 셔츠가 훨씬 오래갔다


단정하고 깔끔한 디자인의 셔츠는

모든 옷에 잘 어울렸다

 

손수건처럼 부드럽고

바람이 솔솔 통하는

얇은 아사와 리넨은 모시처럼 시원하다

잔주름은 멋이 된다



부담 없는 차림의 선두 스타일


10분 후의 외출도 두렵지 않다

옷장 문고리를 잡는 망설임은 필요 없다

 

바빠서 보이는 대로 걸치고 들고 나왔어!


보이는 대로 걸치고 들고 나와도  

언제나 자신 있는 나이기를 바랐다

그런 옷장을 갖고 싶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이고 싶었다

누구는 만만한 게 청바지라는데

나에겐 청바지가 대략 난감이었다

청바지뿐 아니라 대부분의 바지는

치마보다 못했다


휘둘리지 않으려면

단호해져야 했다

인정해야 했다

 

청바지 대신

청색 리넨 바지를 입는다

가지고 있는 신발과도

면티와 셔츠 4종과도 잘 어울린다

봄 여름 가을 바지는 하나로 지낸다

 

어울리는 바지 하나는

어울리지 않는 바지 10개보다 낫다


작은 키에 오히려 귀엽다

청바지를 포기하고

더 많은 스타일을 얻었다


어울리지 않는 패션 종목은

과감하게 포기한다



늘씬함이 부족한 나에게 딱이다

허리에 잔주름이 있는 항아리치마


한여름에도 몸에 붙지 않고

모눈 문양도 단정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선은 감춰 주고

빠른 보폭에도 자유롭다

걸을 땐 너풀너풀 나비가 된 것 같다

 

남에게 어울리는 옷과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구분한다면

기대감으로 구입해서 버려지는 옷들을

줄일 수 있겠다



날씨에 따라

소매를 접어 올리고 내리기도 한다


어깨와 몸통이 자유로운 셔츠를 좋아한다

밑자락을 내어 입어도 넣어 입어도

영화관 의자에 푹 파묻혀도

옷 생각은 나지 않는다



네이비 A라인 리넨 치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수 셔츠와 줄무늬 리넨 셔츠랑

찰떡이다

아사 반팔이랑 입으면

참 곱다

차려입은 것처럼 보인다  

키도 커 보인다

 

가죽끈 목걸이 하나를 두르고

밋밋할까 하는 마음은 내려놓는다



봄 여름 가을 단골 어깨끈 원피스


레트로 한 무늬가 질리지 않는다

입고 벗기 편하고

오래 앉아 있어도 구김 없고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들은 옷이다


10년 된 옷이지만

10년 더 입기를 희망한다

 

어깨끈 안에 반팔티를 입고

서늘해지면 긴팔티를 입는다

디건을 겹쳐 입으면

3 계절이 행복하다

 

긴팔티는 따로 구입하지 않는다

겨울 내의는 외출용도 된다


내의 같은 면티를 입어도

면티 같은 내의를 입어도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그랬다

사람들의 관심보다는

그런 관심을 의식하는 내가 문제였다



나는 오피스룩이나 정장을 소화 못하는

감자 같은 사람이다

된장찌개 같은 사람이다

 

선이 드러나는 옷 보다

선을 숨기는 옷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남겨진 옷들에서 깨달았다

 

나를 알고 입으면 쉬워진다

나를 모르고는 100벌의 옷도

무용지물인 것이다

나를 알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라인 없는 디자인에

차려입은 기분을 주는

오래오래 소중하게 입고 싶은 원피스다

 

위 아래옷을 맞춰 입기 귀찮을 때

무조건 선택되는

작은 키 마른 체형의 내게

입을 때마다 자신감을 준다

이용 빈도가 높다

지금 당장 결혼식에 초대받는다면

고민은 필요 없겠다

 

널 만난 건 행운이야!



같은 소재 같은 디자인으로

검정과 흰 티 2개는

옷장 안에서도 나란하다



햇볕이 강할 때도

바람이 솔솔 통하고

어깨와 팔도 가려준다


다림질도 필요 없는 리넨 셔츠 2개

봄가을 내 옷장의 만만한 친구들이다


무엇과 입어도 언제나 바로 그거였다



흰색과 네이비 얇은 면 셔츠


소재와 디자인이 좋다면

같은 디자인을 입는다

갖고 있는 옷에 잘 어울린다면

굳이 서로 다른 디자인이 필요치 않다


다양성보다는 단순함이 더 좋다



청바지로 안 되는 패션은 없다는데

사도 또 사고 싶은 게 청바지라는데

왜 우리들은 열 가지 색의 청바지로도

만족을 못했던 걸까


왜 애매한 채도의 차이에

마음을 휘둘렸던 걸까

 

청바지를 포기하니 옷 입기가 쉬웠다

이상했다



" 엄마한테 너무 잘 어울려! "

 

딸아이에 한마디에

뜻하지 않게 도전해 본 샤랄라 원피스

올여름엔 나도 사사키 후미오 씨처럼

사복의 제복화를 체험해 보았다

 

복더위의 시작과 함께

원피스 하나로 3주를 보냈다

매일 출퇴근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의

뒷골목 울 탐색했다

 

생선구이 골목에서 밥을 먹고

익선동 어두운 골목을 걸었다

삼청동을 걷고 인사동을 걷고

고궁을 걷고 또 걸었다

 

돌아오면 동그랗게 말아

세탁기에 넣고 널어 두고는

아침이면 걷어 입고 출근했다


옷장문을 열지 않았다

생각이 하나 줄었다

 

사복의 제복화라는 건 그런 거였다

 

면티 4개

셔츠 4개

롱치마 2개

무릎 치마 1개

바지 1개

원피스 3개

 

총 15개의 옷으로

5,6,7,8,9월을 입는다

작년과 다른 것은 원피스 하나가 추가된 것

 

허리띠가 필요하지 않은 옷

다림질이 필요 없는 옷

세탁소가 필요 없는 옷

2 계절 이상 입을 수 있는 옷

 

서로의 연결고리가 있는

디자인과 같은 소재의 옷

모두 걸어 두면 옷 코디도 쉽다


개어 두지 않는다

옷 수납함은 없다



아무리 봐도

나는 나무 같은 사람이다

볼수록 수수한 호박꽃 같다


번쩍번쩍한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남들과 다른 점을 알고 인정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간소해질 수 있겠다

 

딸아이에게 얻은 시계와

오래된 구슬 팔찌들은 어쩐지

밋밋한 나와 내 옷들과 닮아 있다

 

소지품 서랍은 달라진 게 없다



어디에나 어울려서

가벼워서 홀가분해서

손가는대로 들고 다닌다

장바구니 역할도 해준다


겨자색과 검은색은 때가 타는 것도

잊게 해 준다

 

 

오래된 가죽 가방과

2켤레에서 4켤레가 된 신발

3켤레 정도도 좋겠다


발가락이 움직이는 신발을 신는다

이번 생엔 구두는 없는 걸로

 


5,6,7,8,9 월에 입는

옷을 가지고 나와 보니

겨울과 이른 봄 늦가을에

입는 옷이 걸려 있다


겨울 패딩도 안 보이는 벽에 걸려 있다

추운 날씨엔 사복의 제복 화가 더 쉽다

단순해지기 좋겠다

 

예쁜 옷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옷을 소유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입고 싶은 옷과

내게 잘 어울리는 옷은

평행선이다

만나기 힘들다

 

제비 같은 슈트가 탐이 났지만

이제 나는 그렇지 못한 내가 좋아졌다

 

사람도 물건도

욕심껏 가져 보려 했지만

내 가슴에는 다 담기지 않았다

다 사랑할 수 없었다

내 가슴이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비움인가 보다

 

열다섯 개의 옷으로도

나는 날마다 새롭게 입었다

지루하지 않았다

단순함이 주는 신비로움을 체험하며

더 단순해지길 원했다

 

내가 입는 옷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

그런 삶을 알아서 고맙고 감사했다

 

나와 닮은 옷을 입자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written in 2019.09.07

작가의 이전글 작은 집, 공간에 나를 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