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첫사랑'
-안도현
그 여름 내내 장마가 다 끝나도록 나는
봉숭아 잎사귀 뒤에 붙어 있던
한 마리 무당벌레였습니다
비 그친 뒤에, 꼭
한번 날아가보려고 바둥댔지만
그때는 뜰 안 가득 성큼
가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코 밑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돋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자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랑 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날을 잡아 사랑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비가 옵니다. 비를 핑계로 사랑 고백을 미룹니다. 날이 흐립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사랑 고백을 또 미룹니다. 잠시 비는 그쳤지만 이번에는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아 고백을 못했는데 비를 핑계 삼았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소심했습니다. 그 소심함으로 인해 고백의 때를 미루고 미루었습니다. 장마가 완전히 그쳤습니다. 이제 고백을 미룰 핑계거리도 없습니다 .큰 용기를 내어 고백하려고 했지만 이미 첫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나이를 먹어버렸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세월만 보내고 말았습니다. 새봄에 시작한 가슴앓이가 가을이 되도록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을 가슴앓이를 첫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세월은 너무나 깊어버렸습니다. 앳됨도 순수함도 여름의 장마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고백을 포기해야 할까요?
첫사랑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죠. 그 이유는 첫사랑은 짝사랑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해야 하는데,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너무나 떨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마음 다잡기를 반복하지만 고백은 또 못하고 맙니다. 거절당했을 때의 두려움이 고백을 미루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에게서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기보다 차라리 혼자 가슴앓이를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신의 마음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도 고백을 어렵게 만듭니다. 남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순간 지고지순한 사랑이 오염될 것 같은 순수함 때문이죠. 때를 놓치면 첫사랑도 나이와 함께 삶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게 된다는 것을 가을이 오고서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첫사랑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도 가을이 되어서야 알게 됩니다.
주자(朱子)는 ‘권학문(勸學文)’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못 가의 봄풀은 꿈에서 아직 깨지 못했는데, 섬돌 앞의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 봄풀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들어보니 어느새 가을이고 어느새 가을 나뭇잎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사랑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봄풀은 봄풀로서 할 일이 있고, 여름 장마는 여름 장마로서 할 일이 있듯이 가을 오동나무는 가을 오동나무로서 할 일을 첫사랑처럼 하면 되겠지요. 지난 세월을 봉숭아 잎사귀 뒤에 붙어 무당벌레로 살았기에 후회가 된다면 지금부터라도 잎사귀 앞으로 나와 장마를 뚫고 날아오를 수 있으면 됩니다. 장마를 뚫고 날아오를 수 없다면 제자리에서 날갯짓이라도 하면 되겠지요. 코 밑 수염 때문에 첫사랑이 어울리지 않은들 어떻습니까? 코 밑의 수염에 어울리는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지요. 때가 늦어서 하지 못한다는 말보다 현재의 상황에 맞는 사랑을 하고 현재에 어울리는 일을 하는 것이 첫사랑이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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