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보일러

안도현, '시인'

by 인문학 이야기꾼

시인

-안도현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 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시(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벼본다


살구꽃은 복숭아꽃과 함께 시의 소재로 많이 등장합니다. 조선 전기 정극인(丁克仁)이라는 문인은 ‘상춘곡(賞春曲)’이라는 가사(歌辭) 작품을 창조합니다. 시조의 짧은 형식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내용을 시조의 형식을 취하되 3장(세 줄) 구조가 아닌 무한대의 길이로 사실과 정서를 마음껏 담아내는 문학 갈래를 만든 것입니다. 그는 ‘상춘곡’이라는 가사작품에서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에 피어 있고’라고 노래했습니다. 도화(桃花)는 복숭아꽃이고, 행화(杏花)는 살구꽃입니다. 여기서 ‘살구꽃’은 봄을 맞아 마음에 일어나는 흥취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이호우’라는 시조 시인은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고 했습니다. 살구꽃에서 고향의 모습을 본 것이죠.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로 시작하는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에도 살구꽃이 등장합니다. 역시 살구꽃은 고향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에도 살구꽃이 등장합니다. 이 시에서 살구꽃은 그 여자네 집을 떠오르게 하고, 그 여자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환기합니다.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김용택, ‘그 여자네 집’ 중에서


안도현 시인은 ‘살구나무 발전소’라는 시에서 살구나무에 발전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혹한의 추위를 견디고 봄에 살구꽃을 피우는 것은 살구나무가 발전소를 가동하기에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같은 원리로 이 시에서는 살구나무 속에 보일러가 있다고 합니다. 그 보일러가 겨울에도 따뜻한 물을 순환시켜 살구나무가 얼지 않게 하며 봄에 꽃을 터뜨리게 한다고 합니다. 살구나무에 귀를 대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봅니다. 그르렁그르렁 따뜻한 물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미새가 따뜻하게 알을 품어 새끼를 부화시키듯 살구나무에 내재한 보일러는 살구나무가 겨우내 잉태한 꽃망울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화자는 자신의 몸에 귀를 대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봅니다. 쿵쾅쿵쾅 보일러가 힘차게 돌아갑니다. 힘차게 돌아가는 에너지를 시(詩)를 창작하는 에너지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살구꽃이 터지듯이 살구꽃처럼 아름다운 시가 터지기를 화자는 소망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소망하는 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살구꽃이 피듯이 돈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살구꽃 터지듯이 아이디어가 터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구나무가 보일러를 가동하여 맑고 고운 살구꽃 지천으로 피워내듯이, 작가는 자신의 가슴에 켜둔 보일러를 세차게 돌려, 자신의 눈과 귀와 가슴에 담아 두었던 모습과 소리와 생각들을 세상에 터뜨리고 싶습니다. 보일러를 가동시켜 온 방을 따뜻하게 하듯이, 시인은 시의 보일러를 가동하여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시를 쏟아내고 싶다는 소망을 살구꽃처럼 맑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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