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신경림, '莊子(장자)를 빌려 – 원통에서'

by 인문학 이야기꾼

莊子(장자)를 빌려 – 원통에서

-신경림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 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 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 부부 사랑 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莊子』 ‘秋水篇’에 ‘大知觀於遠近’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 시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속초와 원통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것인데, 두 관점 중에서 하나의 관점만으로 세상

을 판단하면 안 된다고 ‘장자(莊子)’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설악산 대청봉에서 작고 큰 산들을 눈아래로 굽어보고 있습니다. 모든 산들이 자신의 발아래 꿇어앉은 것 같습니다. 마을들도, 마을 사람들도 높은 위치에 있는 자신에게 굽신거리며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넓은 바다도 자신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 안달을 하는 듯 보입니다. 높은 곳에 군림하면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속초에 내려와 함경도 아주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피난민으로서의 신세타령도 듣고 그녀의 삶의 애환이 담긴 노령노래도 듣습니다. 멀리서 볼 때 무심해 보이던 함경도 아주머니의 삶이 가까이서 보니 소설보다 더 깊은 삶의 우여곡절이 있음을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원통으로 와서 싸구려 여인숙에서 마늘 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 부부의 사랑 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면서 멀리서 볼 때 보이지 않던 그들의 삶에도 삶의 고단함이 묻어 있음을 조금은 알게 됩니다.


장자(莊子)는 『莊子(장자)』 ‘秋水篇(추수편)’에서 ‘大知觀於遠近(대지관어원근’이라고 했습니다. ‘큰 지혜는 멀리서도 볼 줄 알고, 가까이서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멀리서 숲을 보고서 산을 다 봤다고 해서도 안 되며, 숲속의 작은 나무 몇 개 보고서 산을 다 봤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산의 생김새와 숲의 모양은 멀리서 보고서 알아야 하고,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와 풀과 돌멩이와 새들과 벌레들은 숲속에 들어가보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비로소 산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번역본 『논어(論語)』 한 권을 발췌해서 슬쩍 읽고서는 ‘논어’를 읽었다고, ‘공자(公子)가 어떻네,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어떻네’ 하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속속들이 아는 양 우쭐댄 적이 없었는지를 시인은 묻고 있습니다. 미국 동부 지역 관광을 열흘 정도 다녀왔다고 ‘미국의 자연환경이 어떻네, 미국의 경제가 어떻네, 미국의 교육제도가 어떻네’ 하고 미국을 속속들이 아는 양 으스댄 적이 없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골프를 조금 잘 친다고, 남들보다 수학 문제를 조금 더 잘 푼다고 모든 면에서 남들 위에 군림하여 으스댄 적은 없는지 묻고 있습니다. 골프 치기와 수학 문제 풀기는 조금 미흡할지 몰라도 그 사람을 속속들이 살펴보면 나보다 뛰어난 면이 훨씬 많을지도 모릅니다. 멀리서만 보고, 내 입장에서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고 ‘장자(莊子)’의 말을 빌려 시인은 자신에게 조용히 타이릅니다.

[사진출처]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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