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나무1 - 지리산에서'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화자는 지리산에서 나무들을 보고 있습니다. 반듯하게 우뚝 솟은 나무도 있고, 비틀어져 볼품없는 나무도 있습니다. 우뚝 솟은 나무들에는 실한 열매가 없습니다. 제 치레하느라 열매 맺을 틈이 없었나 봅니다. 반면에 부러지고 비틀어져 볼품없는 나무에는 실한 열매가 많이도 맺혔습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열매 맺기에 온 힘을 기울였나 봅니다.
실한 열매를 맺은 지리산의 나무들을 보면서 사과밭을 떠올려 봅니다. 우뚝 솟은 사과나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사과나무는 한 알의 사과라도 더 매달기 위해 가지는 옆으로 한껏 벌어져 있습니다. 사과나무는 한 알의 사과라도 더 실하게 만들기 위해 줄기가 부르트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과나무는 한 알의 사과라도 더 붉게 만들기 위해 자신을 치레할 틈이 없습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복숭아나무도 본 적이 없습니다. 기품 있게 자란 감나무도 없습니다. 감나무는 땡감을 붉고 예쁘게 물들이기 위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을 감내합니다. 감나무는 땡감을 크게 만들 수만 있다면 가지 한둘쯤은 분질러버릴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수박은 또 어떻습니까? 그렇게 큰 수박을 키우기 위해 수박 씨앗은 애초부터 반듯하게 하늘로 자랄 생각이 없습니다. 실한 수박을 맺을 수 있다면 땅으로만 기어다니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과밭에서 자기 치레하기에 바쁜 나무는,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아마 뽑히고 베어졌나 봅니다.
우쭐대며 솟은 나무들은 햇빛과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듯 위로만 솟아오릅니다. 이웃 나무들의 일조권이나 조망권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이웃 나무를, 동무 나무를 짓밟지는 않습니다. 품종의 습성이 위로 뻗는 나무여서 습성대로 자랄 뿐이죠. 사람은 어떻습니까? 잘난 사람들은 그들끼리 품앗이하듯, 배경도 실력이라며 밀어주고 끌어주죠. 공정이라고 쓰고 특혜라고 읽기도 합니다. 공정해야 할 경쟁에서 특혜는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결과를 낳게 되죠. 잘난 사람들은 그들끼리 그들만의 길을 환하게 열기 위해, 그들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두의 권리를 명분으로 그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기도 합니다. 잘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넘보는 자의 진입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유사 이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지리산의 나무들을 보면서 이웃 동무 나무들과 함께 꽃 피고 열매 맺는 산이 되기를,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나무가 없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하는 시인의 마음이 온 지리산에 메아리치는 소리를 이 시를 통해 듣게 됩니다.
[사진출처] 네이버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