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을 이고 사는 노고단을 바라보면서

신경림, '지리산 노고단 아래 - 황매천의 사당 앞에서'

by 인문학 이야기꾼

지리산 노고단 아래

– 황매천의 사당 앞에서

-신경림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높은 목소리만 들리고

사방이 어두울수록

큰 몸짓만이 보인다

목소리 높을수록

빈 곳이 많고

몸짓 클수록 거기

거짓 쉽게 섞인다는 것

모르지 않으면서

자꾸 그리로만 귀가 쏠리고

눈이 가는 것은

웬일일까


대나무 깎아 그 끝에

먹물 묻혀

살갗 아래 글자 새기듯

살다 가는 일은

서러운 일이다

낮은 목소리 작은 몸짓으로

살갗 아래

분노를 감추고

살다 가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아침 저녁

짙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노고단을 우러르면서


화자는 지리산 노고단 아래에 있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사당 앞에서 발걸음을 멈춥니다. 화자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통분을 가슴에 품은 채 ‘절명시(絶命詩)’ 4편을 마시고 음독 순국한 황현의 삶을 생각합니다. 나라를 잃은 역사적 현실 앞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소명을 다하지 못한 고뇌가 이 세상을 더 살아갈 동력을 잃게 만듭니다. 붓을 들어, 목숨을 끊으며 지은 시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다음은 4수 중, 제3수입니다.


鳥獸哀鳴海岳嚬(오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사라지고 말았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밤 등불 책 덮고 역사를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구나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인한 분노가 태산처럼 크게 일어납니다. 새와 짐승들과 산과 바다가 다 통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통한(痛恨)의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의 무기력이 뾰족한 대나무 끝으로 살갗 아래를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화자는 매천 황현의 삶을 생각하면서 작금(昨今)의 사회를 살아가는 자신에게도 언어의 회초리를 듭니다. 불의와 결탁한 사람들은 그 불의를 덮기 위해 더 큰 목소리를 냅니다. 더 큰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恥部)가 만천하에 드러나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더 큰 권력을 독점하고 대물림하기 위해 여전히 국민을 팔고 국가를 팔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허위 경력은 화려한 이력이 되어 더욱 큰 몸짓으로 당당한 목소리를 냅니다. 그들의 삶이 빈 곳이 많고 거짓이 섞여 있음을 알지만 화자의 눈과 귀는 자꾸 그리로만 향합니다.

주위가 시끄러울수록 작은 목소리는 묻힙니다. 진실의 소리는 묻힙니다. 큰 목소리는 주위의 시끄러움을 뚫고 위세를 떨칩니다. 거짓은 거짓을 숨기기 위해 진실을 포장지로 확대 재생산됩니다. 포장지를 벗겨내면 거짓을 드러낼 수 있지만 포장지 뜯기를 마다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버립니다.이것이 시인의 소명이 아닌 줄 알기에 다시 한번 자신에게 회초리를 들어봅니다.


아침 저녁으로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노고단을 바라봅니다. 푸른 하늘을 우러르면서 사는 노고단의 삶을 조금은 본받자고 다짐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시끄럽더라도 진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기행(紀行)을 계속 할 것을 다짐합니다. ‘대나무 깎아 그 끝에 먹물 묻혀 살갗 아래 글자 새기듯’ 황매천과 같은 삶을 계속 쓸 것을 다짐합니다.

[사진출처]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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