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안의 장날 - 안의에서'
-신경림
산나물을 한 소쿠리 다 팔고
비누와 미원을 사 든 할머니가
늙은 마병장수와 장국밥을 먹고 있다
한낮이 지나면 이내 파장이 오고
이제 내외가 부질없는 안팎사돈
험하게 살다 죽은 사위
아들의 얘기 애써 피하면서
같이 늙는 딸
며느리 안부만이 급하다
손주 외손주 여럿인 것이 그래도 대견해
눈물 사이사이 웃음도 피지만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이토록
오래 살아 있는 것이 영화라고
아니면 더없는 욕이라고
오늘은 5일에 한 번씩 서는 안의 장날입니다. 안의(安義)는 경남 함양에 있는 면(面)이죠. 이 고을 저 고을 사람들이 5일간 미루어두었던 장보기를 위해 안의 장터를 분주히 오갑니다. 겉으로는 무심해 보여도 깊은 사연들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화자는 그중에서 한 장면을 포착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입니다.
할머니는 지난 5일 동안 낮은 산에 올라 조금씩 뜯은 산나물 한 소쿠리를 들고 장에 나왔습니다. 겨우 한 소쿠리입니다. 욕심이 개입될 틈이 없습니다. 산나물을 팔고 꼭 필요한 비누와 미원을 샀습니다. 옆에는 마병장수 할아버지가 앉았습니다. 마병장수는 고물장수인 셈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사돈 간입니다. 내외할 사이가 지난 안팎 사돈은 국밥집에 앉아 뜨끈한 국밥으로 삶의 허기를 채웁니다.
할머니의 딸과 할아버지의 아들이 부부가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사위이자 할아버지의 아들은 험하게 살다가 먼저 죽었습니다. 왜 죽었는지 서사적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뿐입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아니면 민주화 과정에서 죽었는지 추측만 할 뿐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사위와 아들 얘기는 애써 피하고 딸과 며느리 안부가 궁금합니다. 손주와 외손주 얘기에 잠시 웃음꽃이 피기도 합니다. 손주들이 피워주는 웃음꽃에서 삶의 영화가 잠시 스쳐 가지만 더없는 욕된 삶이라는 자책이 엄습해 오기도 합니다. 산나물을 뜯어 생필품을 사야 하는 가난한 삶이 욕된 삶이 아니고, 오래된 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힘겨운 삶이 욕된 삶이 아니고, 자식을 앞세운 삶이 욕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경림 시인은 ‘파장(罷場)’이란 시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라고 했습니다. 안의 장날 장보러 온 사람들은 ‘못난 놈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뜨끈한 국밥 한 그릇으로 삶의 허기를 달래는 그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 한 그들의 삶은 욕된 삶이 아님을 이 시를 읽고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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